(74)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74)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
많은 교회사람들이『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도 율법을 버리면 안된다 라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이루셨으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율법에 메여있지는 않지만, 믿음 안에서 강제나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자율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태복음에서 율법에 대해서
표현하기를『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라든가, 예수님이『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라고 말을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율법에 메여있지는 않지만,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율법을 자율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지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믿음에 따른 행위가 따라야 하는데,『율법을 기쁜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 교회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행하고, 그것에 비추어 죄를 회개하고 있다. 그건 결국 자기의 의를 행하고, 이루어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율법은 무엇인가? 시편에는『율법이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한다』라고 하고 있다.[2]
로마서 7장 10절에는『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이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 되었지만, 본래의 율법은 나에게 생명을 주어야 되는 것인데, 나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말씀이다.『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해서 영혼을
소성케한다』라고 했는데, 완전한 이 계명이『나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라는 것이다. 왜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고,
하자 없는 계명인데, 하자가 있는 것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만일 내가 원치않는 일을 행하면 행하는 이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완전한 율법이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한 이유는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율법을 다 이룰 수 없다』라고 하니까
율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처럼 생각을 한다.
사도바울은 율법과 죄가
있는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율법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3]
사도바울이 율법 아래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전혀 흠이 없고, 의인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 9절에서『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했다. 율법으로 열심이었을 때는『자기는 살았고 의인이었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율법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나니까(계명이 이르매),『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라는 것이다. 죄가 드러나니까『의인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라는 말이다. 사도바울과 같은 율법주의자가 얼마나 율법을 근거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겠는가, 삶 자체가 율법을 거스려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살았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사도바울은『율법이 말하지 않았으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너희가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겠으나, 형제를 보고 미워하면 이미 살인하였느니라』라고 했다.『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그 마음에 간음을 했다』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갈 때,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제자들을 따지는 것이다.『당신의
제자들은 왜 손을 씻지 않고 먹는가』라고 물었다. 예수님이『먹고 뒤로 나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고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사람의 생각,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 인간을 악하게 하는 것이지 먹는 것은 더럽게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다.『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는 율법의 규정이 없었다면『내가 탐내는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라는 말이다. 사도바울도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도바울이 생각해 보니 자기 속에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탐심이 내 속에 있으므로 욕심이 나를 끌고 내려가서 율법으로
가는 것이다. 율법에『탐내지 말라』라고 했는데, 내가 탐내었으니
죄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죄가 없는 자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율법을
바로 깨닫고 나니까, 『나는 율법 아래에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율법에 매여있는 죄인이로구나』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탄식하며『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독백하는 것이다.『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바울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도바울과 같은 율법의 열심인 사람이 그 율법이 말하는 바를 깨닫고 나니까, 내가 이 율법 아래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그 고백 가운데, 말하고 있는 것이『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사람들도 정말 율법적으로
자신을 점검하고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절대로 이 율법적 기준에서는 완전한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이 사도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고백이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며, 최선을 다했는데, 내 스스로 그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된다. 그런 고백이 나올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즉 율법에서 자유케 하는 생명의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과 8장은 사도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죄 때문에 율법으로는 절대 의롭게 될 수 없는 상황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해방이 된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7-8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율법
아래, 즉 죄 안에서 구원하시는 데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율법에는 하자가 없고 인간에게 하자가 있다. 육체를 가지고 있다
라는 말은『하나님을 떠났다』라는 말이다.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몸에 있을 때에는 주와 떨어져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읽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을 죄라고 말한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항상 죄가 인간의 육체와 함께 있는 것이다. 육체 가운데 있는 죄를 없게 하려고
하면『죽어야 한다』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므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동산으로부터 내쫒을 때 생명나무의 길을 두루도는 화염검과 천사를 두어서 지키도록 했는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려면 화염검과 천사를 통과해야만 한다. 즉
육체가 죽어야만 되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님이 그를 믿는 자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말씀하셨는데, 결국『죽으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인간 속에 100% 들어오면 육체는 다 죽게된다. 인간 속에 들어있는 죄를 다
없애려면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오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는 불가능하다.
두번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나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서에서
보면 메시야에 대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데,『이스라엘이 멸망해서 다 흩어져 있는데,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 불러 모아서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일은 가벼운 일이라는 것이며,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4]
창세기 12장 1-3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내가
너로 천하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와 훼방죄를 다 가져가시고 나서, 이제 예수님이 그냥 하나님 나라로 가버리면 예수님이 이루신
일들이 다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시고 또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것을 전하고 증거해야만
한다. 나를 구원하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천하만민이 구원받도록 해야 하는데, 내가 왜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을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도 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나, 인간의 육체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곤란하다.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구원해 주셨는데, 다시 죄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 주셨는지를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설명하고
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고 있다.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확실한 약속을 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새 언약을 말하면서 저희들에게 다시는 죄를 묻지 않겠다 라고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5]
하나님께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으면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전제조건은『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내가
죽는다』라는 것은 육신 속에 있는 『악한 마음이 죽는다』라는 말이고,『율법에 대해서 죽는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이다. 이 죽는 것을
다른 말로 옛마음이 죽는 것이다. 옛마음은 육신으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악인 것이다. 그리고『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새생명을 덧입어야 한다』라는 말이다. 옛마음을
가진 자는 스스로 죄를 생각하지만, 새마음을 가진 자는 죄로 부터 벗어난 자유인이다. 인간이 율법을 기준으로 죄를 짓는지 않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이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 죄를
짓는지 않는지 점검을 한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옛사람이 죽지않고 스스로 옛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수준에서 생각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서 죽으시고, 율법 위에에 부활하셨다. 즉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요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 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도 일반법과 특별법이 서로 저촉될 때는 일반법이 툭별법 위에 있을 수 없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법에
해당한다. 특별법(성령의 법)규정을 적용받는 사람이 스스로 하위 법인 일반법(율법)의 규정에 저촉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어리섞은 짓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 성령으로 도장을 인치시는 것이다. 그러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말씀하고 있다. 모든 죄있는 인간들이 죄와 사망의 법(율법)아래 있었는데, 이 율법 아래 있었던 죄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두었다』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들 생각(마음)속에 두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율법을 자꾸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참된 희생을 모르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율법이 육신(죄)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즉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죄가 있어서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도 우격다짐으로『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인 것이다.
인간이 죄를 가지고 있고, 육신을 가지는 연약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다.『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육신의 모든 죄를 정하시고, 육신을
좇지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요구[6]하는
것을 다 이루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율법의 요구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예수님을 믿는 인간들)에게도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율법의 요구에 의해 죽고,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율법 위), 즉 부활되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에베소서 2장 5-6절[7]에서『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8]에게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 있지만 염려하지 말고,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의 전제조건은 옛사람[9]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10]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 다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정확하게 알고 믿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은 『회개하고[11], 옛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을 떠났던 모든
죄를 예수의 피로 대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했는데, 전도의
결과 그 사실을 믿으면 다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인을 쳐 주시는 것이다. 인을
쳤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 증거는 무엇인가?
내 안에 성령이 있으면
내가 율법 안에 있지 않게 된다.[12]
왜냐하면 성령이 나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인도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냥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인도하시는 것이다. 만일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율법의
기준을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감시한다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라, 율법의 기준에 따르는 자가 된다. 왜 이런 일들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성령의 인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자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상
성령이 안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은 좋은 쪽으로 인도하는데, 여전히
율법에 얽매여 죄를 논하고 있으니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성령이 죄에서 해방시켜 주었는데도
불구하고,『성령은 가만히 있고,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흠이
없게 살아야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성령은 안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의 증거는 내가
율법의 기준을 내세우고 있는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율법의 기준에 얽매이며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율법적 생활을 함에도, 나에게
성령이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혼자 우기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성령이 인도하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자꾸 내 스스로 무엇인가를 찾아 할려고 한다. 결국 성령님께서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님이 인도해
주시는 길로 가면 율법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신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집어 주겠느냐,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주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하시면서『너희가 달라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성령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기를 기다리고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그런데 내가 나를 인도하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13]에서『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화교리를 많이 이야기 한다. 영화와 성화는 분명히 다르다. 성화라는 말은『성스럽게 변화되어 가는』것이다. 이 성화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해 주셔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성화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여전히 인간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때 까지 성스럽게 변화되어 가야된다 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많은 교회사람들은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화는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성스럽게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내세워서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
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되기까지 자라라』라는 말이 있는데, 성화되어 가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복음으로』온전하게 깨달아라 라는 말이다. 그런데 성화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화되어짐』에 대해서 율법을 자율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잘 행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죄를 열심히 회개하면 성화 되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행하여 성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스스로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을 깨닫고 돌아서니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성화를 위해서『인간도
조금은 노력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경에는 성화교리가 없는데, 굳이 성스럽게 되어져가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만일 성스럽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믿는다면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 것이고, 성령을 간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교회 사람들은 성화교리를
믿고 날마다 율법의 기준을 삼고 회개하고 성스럽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니,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것과
배치되는 것이 된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다. 죄는 반드시 죄값을 치른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다.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죽지는 않고 죄를 용서만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또 다시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시대
때, 회개치 않던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물에 대해서 설명하는데,『물은
세례이고 구원의 표』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의 표인 물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고(여전히 더러운 것이 있지만) 그러나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라고 했다.[14]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함에도 육체에는 여전히 더러운 것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더러운 것으로 인하여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죄함을 받지 않도록 성령으로 인을 쳐
주시는 것이다. 완전한 구원을『하나님이 보장해 주셨다』 왜냐하면 미련한 방법인 전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1] 로마서7장1절-8장4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메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 찌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렇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으로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해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3] 빌립보서3장5-6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4] 이사야49장6절: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5] 예레미야31장35절: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라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베드로전서3장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남편 권중광은 큰 싸움 끝에 내 인생의 사랑으로 느려졌습니다. 그는 우리와의 관계가 끝났으며 여러 번 그와 일을 중단 한 후에는 다시는 나를 다시 데려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그를 잃은 후에 그가 내 인생의 사랑임을 깨달았다.
답글삭제나는 그를 다시 원하지만 나는 다시 그를 다치게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를 다시 데려 갈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온라인에서 댓글을 보았고, 서울에서 chaewon이라는 여성의 게시물을 읽었고, 그녀는 2 년 동안 헤어진 후 그녀가 어떻게 그녀에게 돌아 오는지에 대한 간증을했으며, 그녀는 떠났다. 그녀를 위해. 또한 오사 지드 박사에게 저의 전 애인 파트너를 데려가도록 요청하는 메시지를 전자 우편으로 보냅니다. 나는 모든 결혼 문제를 그에게 설명하고, Dr.osagiede는 철자기도 후 2 일 이내에 전 남편을 돌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나는 사랑의 매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나에게 필요한 모든 사랑의 맞춤법 기사와 자료를 제공했으며, 자정기도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첫기도 2 일 후, 나는 오 사지 네드 박사가 사과를하기 위해 휴대 전화로 전화를 걸겠다고 약속 한 것과 똑같이 놀랐고, 남편 아스런은 전화 번호로 알 수없는 전화를해서 사과했다. 만나는 날짜를 수정합니다. 우리는 같은 주에 서로를 자주 보았고, 오 사지 데 사원에서 나를 대신해 사랑의 마법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나는 위대하다. 이 위대한 사람 오 사지에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었지만 노력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나는 이것이 당신의 파트너와 함께 잃어버린 사랑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당신에게도 효과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doctorosagiede75@gmail.com 또는 kakao talk ID [doctorosagiede7] 개인 이메일에 osagiede 박사에게 이메일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