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설을 믿어야 한다
처소는 바로 옷과 같은 것이다 인간 속에는 영혼이 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한 말씀을 깊히 묵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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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솔로몬이「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하였는데,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인가? 인생은 짧고,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된다. 하나님이 솔로몬 왕에게 엄청난 지혜를 주셨고, 솔로몬은 호화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인생 자체가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세도 시편 90편 4-5절에서『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라고 했으며, 10절에서도『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갈릴리로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해서『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번이나 물으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직설법을 사용하지 않고『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세번을 물어본 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면서 막중한 책임을 맡겨주었다. 그리고『네가 원치않은 곳으로 가고 또 죽게될 것이다』라고도 했다. 이 때, 베드로는 요한에 대해서는『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물었다.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한다할지라도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오해를 해서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저 친구는 죽지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요한이 다시 정정해준다.『그 말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다.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솔로몬은『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라고 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했다. 육은 물질세계를 나타내며, 이런 현상적인 세계는『무익하다』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며,『수고와 슬픔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왜 인간들이 이 세상에 오게되었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아직은 살아있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인간들이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서면, 영원한 심판 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솔로몬이 말하는 바는『이 세상은 정말 짧은 순간이므로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이다.
전도서 12장 1절에서『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라고 했다. 이 말은 솔로몬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다. 택한을 받은 이스라엘에게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기억하라』는 말은『과거의 하나님이 네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을 창조하신 일을 생각해 내라』는 말이다. 즉『하나님 나라로 부터,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서 쫒겨온 사실을 알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적으로 부귀영화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육신 속에 영혼이, 왜 이 곳에 쫒겨왔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인생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허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자가 되었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답을 알면 허망하지도 않고, 순식간에 날라가는 것 같지도 않게된다. 성경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는 사도바울이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린도후서 5장 8절에『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라고 했다. 사도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욱 좋다』는 것이다. 이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 세상에 있는 그 자체가 지루한 것이다.
전도서 12장 7절에서『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영혼이 있다. 영혼은 기원에 대해서는 다수의 학설이 있지만, 선재설을 통해서만이 창세 전의 비밀이 설명될 수 있다.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있어야 좋은데, 영혼이 물질인 육체 속에 있는 것은 바로 범죄한 결과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시편 79편 11절, 유다서 1장 6절과 베드로후서 2장 4절에서 말하는 바 영혼들이 흙에 갇힌 것이다. 육체 속에 갇힌 영혼이지만 육체가 죽으면 영혼이 육체로 부터 나온다. 누가복음 8장 55절에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내용이 있다. 이때 죽은 아이의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영혼이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혼이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에 대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잔다』라고 했으며, 구약시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호와 하나님을『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씨의 약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흑암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주고, 옥에 갇힌 자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마태복음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인간들의 영혼이 감옥에 갇혔다고 생각된다면, 감옥에서 나가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감옥인 육체가 좋고, 육체가 살고있는 이 세상이 좋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가 될 것이다. 영혼은 육체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있으면 영혼이 죽은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을 뜻한다. 그러나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다시 부활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십자가에서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요, 율법에 대해서 죽는 것이며,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세상을 좋아하는 자는『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거부하는 자』라는 말이다. 로마서 6장 3-6절에서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좁은 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물질세계에 온 영혼들이 육체에 갇힌 것을 깨닫게 되면 육체로부터 비롯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하여 이 물질세계로 쫒겨온 것을 기억해야만,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 영혼이 하나님의 처소를 다시 덧입게 되는 것이다. 고향이 있음을 생각하는 사람 만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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