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사랑이 아니라 의가 나타났다
복음에는 ‘사랑’이 아니라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전파하는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려고 힘쓴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주께로 돌아올 줄 안다. 하기야 세상은 온통 사랑을 추구한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의 주제는 배우들만 바뀔 뿐이지 스토리는 언제나 사랑이다. 인간은 평생 사랑을 구한다. 온 세상이 바라는 그 사랑은 자신이 받기 원하는 사랑이다. 자신이 사랑을 주려는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기 원하는 그 사랑을 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Agape)가 아니라 성경에 단 한번도 기록되지 않은 사랑, 에로스(Eros)이다. 현대교회는 하나님을 모르거나 거부하는 영혼들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믿게 하려고 힘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전하시려는 성경 전체의 멧세지는 ‘나를 믿으라’가 아니라 ‘내게 돌아오라는 회개’이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교회에 전한 복음에는‘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기록했다.(로마1:17)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말씀이 이어진다.(로마1:18)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때에 죄인들은 죄에서 깨어나 회개할 수 있다.사실은 회개와 믿음이 분리될 수 없다. 거듭남과 세례도 분리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내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씻어진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를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상에서의 안정을 위해 예수의 도움을 청하며 평생 사는 이들이 많다.회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예수가 믿어진다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 수가 없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은 것이 믿어진다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겠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자신을 위하여 예수 믿으라고 한다. 예수 믿으면 좋다고. 이것은 거짓 복음이다.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어버릴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정말 마지막 때이다. 할 수 만 있으면 택하신 자도 넘어뜨리려는 미혹이 현대교회 안에 가득하다. ‘주여, 저와 함께 해 주세요’라는 믿음의 기도 이전에 필요한 고백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회개이다.‘나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9)’라는 회개의 고백이 먼저다. 예수가 주인이 되고 우리가 예수의 종이 되는 것이 회개이다.그래야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예수가 주님이 아닌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불법이다.
탕자의 비유가 현대교회의 설교에선 완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계시된 멧세지로 거의 보편적인(Catholic) 유행이다.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하면 다 내어주는 아버지 사랑. 아들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랑.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어버릴찌라도 다 내어주는 그 사랑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을 받는데도 사랑의 아버지를 거절하고 아버지를 떠날 정도로 나쁜 아들이라는 멧세지는 전하지 않는다. 그렇게 좋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전하면서 그렇게 나쁜 아들이라는 것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 나오지 않을까봐.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절할 만큼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있다. 인간이 얼마만큼 타락했느냐 하면 아들이 달라고 하는 대로 다 내어주는 사랑의 아버지를 거절할 만큼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해줘도 사랑하는 존재 자체를 버릴 만큼 악하다. 죄인은 사랑해줘도 하나님 아버지를 버린다는 것이 탕자의 비유다. 사랑으로도 주께 돌아올 수 없다. 예수님이 그날 전하신 첫번 째 비유는 목자가 양을 찾는 이야기다. 양이 목자를 찾는 표현은 전혀 없다. 두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동전 이야기다. 동전 스스로는 주인을 찾을 수 없이 죽어있는 생명이다. 세번 째 비유가 탕자 이야기다. 탕자는 아예 아버지를 버린다. 이것이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이다. 첫번째 비유에서 양은 죽지 않았다. 세상에서 놀고 있다.두번 째 비유의 동전은 죽어있다. 주인에게로 움직이지 않는다. 세번 째 비유의 탕자는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 안에서 아버지를 죽여버렸다. 이렇게 인간은 악하다. 이것이 회개의 복음이다.
그런데도 현대교회는 탕자와 같은 잃어버려진 영혼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려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만을 전한다. 그 사랑을 누리면 죄인들이 돌아올 거라고 가정한다. 탕자의 비유가 주려는 교훈과 정반대로 결론짓는 거짓복음이다. 이것이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증거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1:10) 먼저 사람들에게 좋게하면 안된다. 그것이 결국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엡2:1)은 세상 풍속(Course)을 추구하기 위해 아버지의 재산은 원하면서,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르기 위해서 사랑의 아버지를 버렸다.(엡2:2) 그는 세상 풍속을 따라 허랑방탕하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아버지 없이 아버지가 주신 것은 사탄에게 빼앗길 수 밖에 없다.하와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뱀과 대화했을 때처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마자 에덴동산을 잃어버렸다. 아버지 재산을 다 날린 탕자처럼.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이다. 창조하자마자 범죄한 아담과 신약의 탕자는 똑같은 상태이다.
방주 바깥에는 진노의 물심판 뿐이다.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물로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 때문이다. 비(Rain)라는 것이 없던 시절에 방주 자체가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심판이 없다면.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에 방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노아의 때에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악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죽이고 싶을 만큼. 그러나 엄마들 보기에는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그렇게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이 40일 밤낮을 물로 덮어버릴 만큼 진노하시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노아를 통해 계시한 방주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수 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기로 결정한 세상에 필요한 것은 폭우와 홍수가 내려오는 꿈과 계시가 아니라, 노아가 힘써서 만들고 있는 방주 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어리석어 보이는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깨달을 수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소식은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뉴스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의(義)의 말씀이다. 사랑이 홍수처럼 넘치는 이 시대에 방주만한 의의 복음이 눈에 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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