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때 부터 인자의 임할 때 까지 구원은 같다
노아의 때부터 인자의 임할 때까지 구원은 같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벧전4:18)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겨우’라는 헬라어는 ‘어렵게(scarcely)’라는 뜻이다. 구원의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마7:14) 제자들은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그런데 요즘 구원의 길을 들으면 ‘이렇게 천국가는 것이 쉽다면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진다. 요즘 목사들의 사명은 얼마나 구원을 쉽고 간결하고 빠르게 설명할 수 있는 가하는 능력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구원은 아주 어렵고 두려운 것이다. 찾는 이가 적고 등불의 기름이 모자라면 구원의 좁은 문은 방주처럼 닫혀버릴 것이다.
구원은 사람이 진지하게 영접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사람이 간절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방주 바깥에 있던 노아의 형제들처럼 노아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도 스스로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가들이 회복시켰던 회개의 진리인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다. 회개하지 않은 인간은 사랑의 아버지도 버릴 만큼 전적으로 타락했다. 사랑으로 돌이켜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이다. 탕자처럼, 아담처럼 그리고 노아의 동생들처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할 때도 같다.(마24:37) 그 당시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8명이다.(벧전3:20)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고 595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니 노아의 형제들만해도 얼마나 많았을까.(창5:30) 그런데 그 당시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은 노아밖에 없었다.(창6:9) 그래서 방주를 함께 만든 노아의 직계가족 8명만 겨우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살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두렵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56세였을 때 아담이 죽었다. 아담이 죽은 후 57년 뒤에 에녹이 승천하였으니까 그 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113세였다. 그 후 69년 뒤에 라멕이 노아를 낳았다. 그러니까 노아는 처음 시작된 사람의 조상 아담의 죽음을 목도했던 아버지 라멕에게로부터 아담이 쫓겨났던 에덴동산 이야기와 노아의 증조할아버지 에녹의 승천 이야기까지 직접 들었다. 이 모든 사건이 노아 시대에는 역사가 아니라 실제 뉴스였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가 시작되기 5년 전에 죽었다.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홍수가 나던 해에 죽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전쟁할 때에 태양이 중천에 하루종일 머물렀다는 기록과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애도하려고 지은 활의 노래가 기록되었다는 야살의 책이 구약성경에 인용되었다.(여호수아10:13, 사무엘하1:18) 현대의 성경비평학의 추론대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야살의 책과 여호와의 전쟁기(민수기 21:14)가 참고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 안에 이런 책들이 언급되어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성경에서는 배제되었다. 그런데 그 야살의 책에 보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신앙이 별로였다. 어떻게 아담과 동시대를 살았고, 하늘로 승천한 에녹의 친손자인 라멕은 신앙이 없었다는게 놀랍고 두렵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그래서 하나님은 할아버지 므두셀라와 손자 노아에게 120년이라는 회개할 기간을 외치라고 말씀하셨고 그 둘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외치면서 의의 말씀을 전파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노아의 친동생들마저.
창세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야살의 책에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5년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니까 의의 말씀을 함께 전파했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방주 만드는 것을 다 보았는데 신앙이 부족한 아버지 라멕은 홍수나기 5년 전에 죽었으니까 방주 만드는 것을 보지 못한 셈이다. 신기하게 하나님이 기록하신 정경에는 사람들이 흥미있어할 이야기는 오히려 삭제되었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노아는 승천한 에녹의 딸과 결혼하여서 먼저 야벳을 498세에 낳고 502세에 셈을 낳았고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아들 함을 낳은 이야기는 없다. 노아의 어머니는 에녹의 아들, 그의 삼촌의 딸이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실 것은 알게 된 노아를 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아내를 얻으라고 하셨고 자녀를 낳은 후에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철저하게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자신이 이해가 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그런 삶 자체가 자신이 섬기는 우상숭배인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할지라도. 죄의 기준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 안에만 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는지 양심만으로는 깨닫기에 모자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성경에 기록하시고 예정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노아의 때에 120년 동안이나 의의 복음을 전파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3년 동안이나 기적을 직접 경험하고 영생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고 고백한 제자들마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주를 버렸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국가들마저 장악했던 중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성경에도 없는 면죄부를 교황청이 파는 대로 샀고 고해성사를 심리학적으로 구원의 길로 받아들였다. 이것에 저항했던 프로테스탄트는 너무나 적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성경은 이미 예언했다.
사도행전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였다.(행9:31) 그런데 현대교회는 주를 두려워함은 없고 성령의 위로만을 강조한다.하나님을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짜 구원의 길이다.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다.‘겨우’라는 헬라어는 ‘어렵게(scarcely)’라는 뜻이다. 구원의 길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마7:14) 제자들은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그 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그런데 요즘 구원의 길을 들으면 ‘이렇게 천국가는 것이 쉽다면 누가 구원을 받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진다. 요즘 목사들의 사명은 얼마나 구원을 쉽고 간결하고 빠르게 설명할 수 있는 가하는 능력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다. 구원은 아주 어렵고 두려운 것이다. 찾는 이가 적고 등불의 기름이 모자라면 구원의 좁은 문은 방주처럼 닫혀버릴 것이다.
구원은 사람이 진지하게 영접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사람이 간절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방주 바깥에 있던 노아의 형제들처럼 노아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는다면, 아무도 스스로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가들이 회복시켰던 회개의 진리인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이다. 회개하지 않은 인간은 사랑의 아버지도 버릴 만큼 전적으로 타락했다. 사랑으로 돌이켜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이다. 탕자처럼, 아담처럼 그리고 노아의 동생들처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할 때도 같다.(마24:37) 그 당시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8명이다.(벧전3:20)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고 595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니 노아의 형제들만해도 얼마나 많았을까.(창5:30) 그런데 그 당시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은 노아밖에 없었다.(창6:9) 그래서 방주를 함께 만든 노아의 직계가족 8명만 겨우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살지 않은 것이 다행이고 두렵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56세였을 때 아담이 죽었다. 아담이 죽은 후 57년 뒤에 에녹이 승천하였으니까 그 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113세였다. 그 후 69년 뒤에 라멕이 노아를 낳았다. 그러니까 노아는 처음 시작된 사람의 조상 아담의 죽음을 목도했던 아버지 라멕에게로부터 아담이 쫓겨났던 에덴동산 이야기와 노아의 증조할아버지 에녹의 승천 이야기까지 직접 들었다. 이 모든 사건이 노아 시대에는 역사가 아니라 실제 뉴스였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홍수가 시작되기 5년 전에 죽었다.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홍수가 나던 해에 죽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전쟁할 때에 태양이 중천에 하루종일 머물렀다는 기록과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애도하려고 지은 활의 노래가 기록되었다는 야살의 책이 구약성경에 인용되었다.(여호수아10:13, 사무엘하1:18) 현대의 성경비평학의 추론대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야살의 책과 여호와의 전쟁기(민수기 21:14)가 참고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 안에 이런 책들이 언급되어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성경에서는 배제되었다. 그런데 그 야살의 책에 보면 노아의 아버지 라멕의 신앙이 별로였다. 어떻게 아담과 동시대를 살았고, 하늘로 승천한 에녹의 친손자인 라멕은 신앙이 없었다는게 놀랍고 두렵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그래서 하나님은 할아버지 므두셀라와 손자 노아에게 120년이라는 회개할 기간을 외치라고 말씀하셨고 그 둘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외치면서 의의 말씀을 전파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노아의 친동생들마저.
창세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야살의 책에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5년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니까 의의 말씀을 함께 전파했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방주 만드는 것을 다 보았는데 신앙이 부족한 아버지 라멕은 홍수나기 5년 전에 죽었으니까 방주 만드는 것을 보지 못한 셈이다. 신기하게 하나님이 기록하신 정경에는 사람들이 흥미있어할 이야기는 오히려 삭제되었다. 야살의 책에 의하면 노아는 승천한 에녹의 딸과 결혼하여서 먼저 야벳을 498세에 낳고 502세에 셈을 낳았고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아들 함을 낳은 이야기는 없다. 노아의 어머니는 에녹의 아들, 그의 삼촌의 딸이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실 것은 알게 된 노아를 결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아내를 얻으라고 하셨고 자녀를 낳은 후에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다.
철저하게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자신이 이해가 되는 것만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그런 삶 자체가 자신이 섬기는 우상숭배인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할지라도. 죄의 기준은 우리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 안에만 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는지 양심만으로는 깨닫기에 모자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성경에 기록하시고 예정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노아의 때에 120년 동안이나 의의 복음을 전파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3년 동안이나 기적을 직접 경험하고 영생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고 고백한 제자들마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주를 버렸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국가들마저 장악했던 중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성경에도 없는 면죄부를 교황청이 파는 대로 샀고 고해성사를 심리학적으로 구원의 길로 받아들였다. 이것에 저항했던 프로테스탄트는 너무나 적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성경은 이미 예언했다.
사도행전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였다.(행9:31) 그런데 현대교회는 주를 두려워함은 없고 성령의 위로만을 강조한다.하나님을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짜 구원의 길이다.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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