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말하기를『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갈 때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는 영광의 주님이었다.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비추면서 주님은 말씀하셨다.『사울아 넌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사울이『주여 누구십니까?』하니 주님은『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답하셨다. 바울은 이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되었다. 그런데 그게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삼일 동안 먹지도 못하고 눈은 소경이 되었다. 삼일 뒤에 주님이 아나니아를 보내어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사울아 왜 주저하느냐 너는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고 말했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회개고 세례이다.
삼일 동안 바울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못박히신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이다. 바울 서신은 모두 다 교회에 편지한 것인데, 그래서 회개 라는 단어가 복음서보다 확 줄어든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회는 핍박받던 자들이었다. 핍박 속에서도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는 것을 듣고 따른 자들이니 회개라는 단어가 안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회개라는 말이 나온다. 사도행전 20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한다.『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첫째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두번째 회개하는 자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의 공로 때문에 믿는 자에게 믿음이 주어진다.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연합되기 위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전해지는 소식은 회개이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내가 있다. 나를 믿으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로 돌아오라』이다. 사도행전 26장 20절에서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도록 했다.
세례요한이 전한 것과 같은 것이다. 누가복음 3장 7절 에서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회개하고 거듭나기 전에는 그 아버지는 마귀인 것이다. 육체를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안에 혼이 다 마귀에게 점령당한 것이다.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독사의 자식들이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장차 올 진노를 피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3장 8절에서『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한 것이다. 좋은 열매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말한다. 선행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을 버리고 회개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리들이 3장 10절에서 묻는다.『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회개는 고백이 아니라 무엇을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돈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인류 최대의 우상은 돈이다. 오른손과 이마에 표나 이름이나 짐승의 숫자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를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돈이 마지막 신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에게 하나님 만큼 높아지는 것은 돈이다. 무리가 물을 때 세례요한이 말해주는 것이 다 돈에 대한 이야기이다. 3장 11절에서 세레요한이『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선행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선행과 연관되어 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과 부딪힐 것이다. 선행이 아니라 회개의 합당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교회들에게 이미 회개한 자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미 회개하고 세례를 보낸 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바울 서신에서는 회개가 아니라 세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전도를 할 때 예수믿고 구원을 받으라 라고 말한다. 설득하고 설명하려고 하며, 상대방의 지적 동의를 받으려고 한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은『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할 것이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안된다. 마지막 날에는 심판 때까지 쌓은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보는 것이다. 회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행동으로 전환되는 것이 진정한 회개라는 말이다. 돈을 신으로 생각하는 자에게 세레요한이 회개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어두움에 처해 있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빛에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이 빛은 생명이라』고 한다. 복음의 시작은 빛이다. 사도바울은『복음의 광채가 우리에게 비췄다』고 말한다. 골로새서 1장 14절에서는 『어두움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이것이 속량이다. 주님이 자기의 죽음의 값을 지불해서 우리를 사셨다는 말이다. 이 일은 회개하는 자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죄사함도 그저 받는 것이다. 죄사함을 거져 받는 것은 속량, 어두움에서 건져낼 때 죽음의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죄사함을 거저 받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회개의 열매가 없다면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민수기 9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유월절을 딱 한번 지켰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1년이 지났는데, 유월절을 지켜라』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월절 행사를 했지만 그 다음해부터 39년 동안은 한번도 지키지 않았다. 주님은 그 다음에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 다음의 사건이 정탐꾼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열정탐꾼의 말을 듣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애굽을 나왔던 모든 백성들이 다 통곡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고 진노하였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통곡한 것은 자기들이 죽을까봐 두려워서 우는 것이다. 회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너희는 가나안 땅에 절대 못들어간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이 철회되는 순간이다. 유월절 지키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도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철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열처녀의 이야기에서도 미련한 다섯 처녀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상 주님이『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은 적이 없이 믿기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복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회개없는 믿음, 회개없는 세례는 다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회개없는 믿음은 거듭나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한다. 회개하는 자는 세상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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