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향한 주의 뜻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1:1) 사단은 하나님께 그에 대하여 참소하기를 욥은 복을 주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신 복을 따른 거라는 것이다. 그 참소로 인해 욥에게 임한 고난은 혹독했다. 자녀들은 죽었고 비즈니스는 망했다. 그런데 욥은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다.(1:22) 아내의 저주스런 말에도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2:10)
그 후 욥의 세 친구가 와서 그를 보고 7일간을 슬피 울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물은 욥을 무너뜨렸다.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 (3:1) 아내의 혹독한 말에도 넘어지지 않았던 욥이 친구들의 눈물에 넘어졌다.
그 친구들의 눈물은 순수했고 욥을 향한 사랑이겠으나,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신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었고 순전하지 못했다. 진리가 결여된 눈물의 사랑 앞에 욥은 스스로 무너졌다. 이런 진리가 결여된 사랑을 주의해야 한다.
그 친구들의 신앙은 사단이 참소했던 바로 그 신학이었다. 욥이 하나님을 따르는 이유는 복을 주신 주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복 때문이라는 참소였는데,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환경을 가지고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해석한다. 데만사람 엘리바스는 말한다.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7) 순수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그들의 눈물이 마르면서 그들의 입에서는 정죄와 비판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은 이들의 위로는 곧 상처를 주는 비판으로 바뀌게 되어있다. 불순종한 천사가 사단이 되었듯이.
그 친구들의 신학은 동화책에 나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수준이었다. 선한 사람은 결국 잘되고 악한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된다는 어린이 동화책. 그런데 세상의 모순과 혼돈을 경험하면서 어른들은 그 동화책을 자연히 놓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서조차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 의로운 목회자가 대형목회하는 것도 아니고 불의한 자가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친구들은 욥의 상황으로 욥의 상태를 해석하면서 회개하라고 권면한다. 욥은 눈물이 마른 친구들의 신학에 대항한다. 친구들의 권면은 날카롭운 정죄로 바뀌고 고난받는 욥을 더욱 아프게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의(不義)에 의해서 억울하게 정죄된 의(義)였다. 욥처럼. 사단으로부터 고난과 친구들로부터 고통받는 욥에게는 장차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계시받는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19:25)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는 자주 축복 가운데 보다는 고통 가운데 우리에게 임한다. 십자가의 공로를 깨닫기에 축복보다 고난이 귀하게 여겨진다. 적어도 욥에게는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친구들의 회개를 먼저 인도하시지 않고, 온전했던 욥을 먼저 회개하게 하셨다.(42:6)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회개는 욥의 친구들이 이끌었던 회개하고는 달랐다. 친구들은 죄악을 회개토록 했지만, 욥이 슬픔과 고통 가운데 주님을 대면하면서 도달한 회개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恨, 미워하고 hate myself)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42:6) 욥의 친구들은 욥과 그 처지를 바라보며 티끌 가운데 회개하였었다.(2:12) 그런데 고난받고 상처받은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게 되었다. 티끌은 죄악을 상징하지만 재는 자아부인(自我 否認)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자를 그렇게 더 깊은 회개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특히 슬픔과 아픔 가운데서.
욥이 고난 후에 받은 것은 축복의 회복이라기보다 깊은 회개였다. 자아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욥에게 축복은 삶과 예배의 결과였지 목표가 아니였다. 세상에서 어떠한 복을 누릴지라도 십자가보다 더 감격스런 축복은 없음을 기억하자 아무리 삶이 아프고 슬플지라도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주님의 십자가보다 우리에게 더 큰 슬픔은 없음을 잊지말자.
그 후 욥의 세 친구가 와서 그를 보고 7일간을 슬피 울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물은 욥을 무너뜨렸다.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 (3:1) 아내의 혹독한 말에도 넘어지지 않았던 욥이 친구들의 눈물에 넘어졌다.
그 친구들의 눈물은 순수했고 욥을 향한 사랑이겠으나,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신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었고 순전하지 못했다. 진리가 결여된 눈물의 사랑 앞에 욥은 스스로 무너졌다. 이런 진리가 결여된 사랑을 주의해야 한다.
그 친구들의 신앙은 사단이 참소했던 바로 그 신학이었다. 욥이 하나님을 따르는 이유는 복을 주신 주님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복 때문이라는 참소였는데,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환경을 가지고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해석한다. 데만사람 엘리바스는 말한다.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7) 순수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그들의 눈물이 마르면서 그들의 입에서는 정죄와 비판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않은 이들의 위로는 곧 상처를 주는 비판으로 바뀌게 되어있다. 불순종한 천사가 사단이 되었듯이.
그 친구들의 신학은 동화책에 나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수준이었다. 선한 사람은 결국 잘되고 악한 사람은 징벌을 받게 된다는 어린이 동화책. 그런데 세상의 모순과 혼돈을 경험하면서 어른들은 그 동화책을 자연히 놓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서조차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고 의로운 목회자가 대형목회하는 것도 아니고 불의한 자가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친구들은 욥의 상황으로 욥의 상태를 해석하면서 회개하라고 권면한다. 욥은 눈물이 마른 친구들의 신학에 대항한다. 친구들의 권면은 날카롭운 정죄로 바뀌고 고난받는 욥을 더욱 아프게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불의(不義)에 의해서 억울하게 정죄된 의(義)였다. 욥처럼. 사단으로부터 고난과 친구들로부터 고통받는 욥에게는 장차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계시받는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19:25)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는 자주 축복 가운데 보다는 고통 가운데 우리에게 임한다. 십자가의 공로를 깨닫기에 축복보다 고난이 귀하게 여겨진다. 적어도 욥에게는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친구들의 회개를 먼저 인도하시지 않고, 온전했던 욥을 먼저 회개하게 하셨다.(42:6)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회개는 욥의 친구들이 이끌었던 회개하고는 달랐다. 친구들은 죄악을 회개토록 했지만, 욥이 슬픔과 고통 가운데 주님을 대면하면서 도달한 회개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恨, 미워하고 hate myself)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42:6) 욥의 친구들은 욥과 그 처지를 바라보며 티끌 가운데 회개하였었다.(2:12) 그런데 고난받고 상처받은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게 되었다. 티끌은 죄악을 상징하지만 재는 자아부인(自我 否認)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자를 그렇게 더 깊은 회개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특히 슬픔과 아픔 가운데서.
욥이 고난 후에 받은 것은 축복의 회복이라기보다 깊은 회개였다. 자아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욥에게 축복은 삶과 예배의 결과였지 목표가 아니였다. 세상에서 어떠한 복을 누릴지라도 십자가보다 더 감격스런 축복은 없음을 기억하자 아무리 삶이 아프고 슬플지라도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주님의 십자가보다 우리에게 더 큰 슬픔은 없음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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