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매스미디어
예수와 매스 미디어
스타탄생. 옛 영화제목이다. 아무것도 아닌 시골 여인이 유명한 가수가 되는 이야기. 그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극장(Theater)들을 찾아가 대중을 만나야 했다. 그녀를 스타가 되게 만든 것은 그녀의 노래와 대중을 만나게 한 광장과 극장이었다. 그 극장은 헬라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고고학적으로 헬라 문화를 이루는 하드웨어는 극장, 광장, 도서관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모였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현재와 만나기 위해 극장과 광장에 모여졌다. 오늘날엔 그렇게 대중들이 공감하게 하는 하드웨어를 매스미디어(Mass Media)라고 하는데, 극장과 광장에서 시작된 미디어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중이라고 번역되는 Mass의 성경적인 개념은 예수 앞에 모여들었던 허다한 무리들이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누가 5:1,2) 예수 앞에 무리들이 모여들었는데 예수는 그 대중을 주목하지 않고 두 배를 보셨다. 또 하나의 본문도 마찬가지인데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누가12:1) 싸이의 공연처럼 무리 수만 명이 서로 밟힐 만큼 모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중에게 주목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대중(매스, Mass)은 예수께 집중했지만, 예수는 소수에게 집중하셨다.
정치는 다수의 표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와 친할 수 밖에 없다. 정치가와 선지자는 다 사람들에게 의를 말하는데 정치가가 말하는 의는 다수가 공감하는 사람들의 의다. 그 의는 공의(公義)가 아니라 공동의 이익(公益)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이 주목하는 힘없는 소수에게 나타나는 불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 의는 손해과 고통에 대한 정의(正義, Justice)이다. 세상의 미디어는 매스 미디어이다.
그러나 성경의 미디어는 소수미디어이다. 예수는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을 때 소수에게 집중하셨다.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서로 밟힐 만큼 모였을 때 예수는 소수의 제자에게 집중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히브리백성에게 누룩없는 떡으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요구하신 것처럼, 소수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누룩은 본성이 전체에 퍼지게 하는 힘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서 나오는 것을 누룩이라고 표현하신다. 바리새인이 추구한 것은 선지자의 영향력이 아니라 정치가의 영향력이라는 의미이다.
왜 예수님은 대중에게 주목하지 않았을까. 글쎄 사람들이 찾았을 때 숨기도 하셨다.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모든 사람이 듣게 하기 위하여 매스 미디어가 필요한 줄 여기는 현대 교회와는 좀 달랐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한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광고는 목적이 같아 보인다. 그래서 매스 미디어는 최고의 시청률을 유지하기 위해 스타가 필요하고 스타를 만들어내고 이용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처럼 유명해졌다가 솔로몬이 고백한 전도서의 공허와 허무를 맛보며 사라진다.
시골사람 나사렛 예수는 그의 손에 주어진 기적과 그의 입으로 나오는 천국 리포터로서 스타가 될 수 있었다. 대중들이 그를 찾았고 그렇게 원했다. 그런데 예수는 광야로 숨었었고 결국 사람들이 혐오하는 십자가 위에 숨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다. 매스 미디어는 교회보다 더 사랑을 말하고 교회는 그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오히려 매스 미디어를 의지하고 배운다. 매스 미디어는 시청률을 위해 공익을 전하는 것이지 공의를 전하지 않는다. 시청률을 위해 그 대중들 안에 있는 죄를 지적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을 추구하는 허다한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러 오셨다.
스타탄생. 옛 영화제목이다. 아무것도 아닌 시골 여인이 유명한 가수가 되는 이야기. 그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극장(Theater)들을 찾아가 대중을 만나야 했다. 그녀를 스타가 되게 만든 것은 그녀의 노래와 대중을 만나게 한 광장과 극장이었다. 그 극장은 헬라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고고학적으로 헬라 문화를 이루는 하드웨어는 극장, 광장, 도서관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에 모였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현재와 만나기 위해 극장과 광장에 모여졌다. 오늘날엔 그렇게 대중들이 공감하게 하는 하드웨어를 매스미디어(Mass Media)라고 하는데, 극장과 광장에서 시작된 미디어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으로 확장되고 있다.
대중이라고 번역되는 Mass의 성경적인 개념은 예수 앞에 모여들었던 허다한 무리들이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누가 5:1,2) 예수 앞에 무리들이 모여들었는데 예수는 그 대중을 주목하지 않고 두 배를 보셨다. 또 하나의 본문도 마찬가지인데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누가12:1) 싸이의 공연처럼 무리 수만 명이 서로 밟힐 만큼 모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대중에게 주목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대중(매스, Mass)은 예수께 집중했지만, 예수는 소수에게 집중하셨다.
정치는 다수의 표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매스 미디어와 친할 수 밖에 없다. 정치가와 선지자는 다 사람들에게 의를 말하는데 정치가가 말하는 의는 다수가 공감하는 사람들의 의다. 그 의는 공의(公義)가 아니라 공동의 이익(公益)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이 주목하는 힘없는 소수에게 나타나는 불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 의는 손해과 고통에 대한 정의(正義, Justice)이다. 세상의 미디어는 매스 미디어이다.
그러나 성경의 미디어는 소수미디어이다. 예수는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을 때 소수에게 집중하셨다. 셀 수 없는 무리들이 서로 밟힐 만큼 모였을 때 예수는 소수의 제자에게 집중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히브리백성에게 누룩없는 떡으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요구하신 것처럼, 소수의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다. 누룩은 본성이 전체에 퍼지게 하는 힘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서 나오는 것을 누룩이라고 표현하신다. 바리새인이 추구한 것은 선지자의 영향력이 아니라 정치가의 영향력이라는 의미이다.
왜 예수님은 대중에게 주목하지 않았을까. 글쎄 사람들이 찾았을 때 숨기도 하셨다.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텐데 말이다. 모든 사람이 듣게 하기 위하여 매스 미디어가 필요한 줄 여기는 현대 교회와는 좀 달랐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한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텔레비전과 인터넷의 광고는 목적이 같아 보인다. 그래서 매스 미디어는 최고의 시청률을 유지하기 위해 스타가 필요하고 스타를 만들어내고 이용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처럼 유명해졌다가 솔로몬이 고백한 전도서의 공허와 허무를 맛보며 사라진다.
시골사람 나사렛 예수는 그의 손에 주어진 기적과 그의 입으로 나오는 천국 리포터로서 스타가 될 수 있었다. 대중들이 그를 찾았고 그렇게 원했다. 그런데 예수는 광야로 숨었었고 결국 사람들이 혐오하는 십자가 위에 숨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단 한가지다. 매스 미디어는 교회보다 더 사랑을 말하고 교회는 그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오히려 매스 미디어를 의지하고 배운다. 매스 미디어는 시청률을 위해 공익을 전하는 것이지 공의를 전하지 않는다. 시청률을 위해 그 대중들 안에 있는 죄를 지적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는 사랑을 추구하는 허다한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러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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