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4장 18절에서 묻는다.『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그런데, 사도행전에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를 하니까 삼천명이 주께 돌아왔다는 말을 한다. 왜 이렇게 상반된 듯한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서『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노아 때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8명이라고 했다. 베드로후서 2장 5-8절에는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베드로의 사도행전 설교를 바라보아야 하나, 아니면 베드로 전후서의 설교를 바라보아야 하나?
우리의 인생에 평안이 없는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랑의 하나님이 대세다. 탕자가 돌아 오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회개없이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하는 기독교는 잘못된 것이다. 노아는 당대 의인이라고 했다. 노아는 주님의 사랑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의를 전파한 것이다. 우리도 주님의 나라와 의를 전파해야 한다. 의가 없으면 평안함도 없다. 손해를 보더라도 의를 지켜야 한다. 노아 때나 오늘날의 시대나 죄악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에게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말이다. 아담이 범죄한 후 아담의 가정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형이 동생을 예배로 인하여 죽이는 사건이다. 죄는 즉시 문 앞에 엎드리고 있다. 가인이 살인을 본적이 없는데도 아벨을 죽였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의를 전파하도록 하셨다. 엄격히 말하자면 의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함께 한다. 의와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즉 의가 없는 사랑은 거짓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랑만을 말한다면 바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야 진정한 회개가 나올 수 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백이십 년간의 기간을 주신 것이다. 이 기간에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노아의 부모와 형제들도 듣지 않는데, 많은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마귀에게 속았던 것이다. 그리고 백이십년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었지만, 방주에는 노아와 식구 8명만 들어가게 된 것이다.『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이 말은 시편에서 다윗이 말했으나 노아 때를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만을 생각한다.『나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 곧 불 심판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의 시대 만큼이나 악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 주님은 다 불로 태우기를 원하신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방주의 안과 바깥은 역청으로 칠하도록 명하셨다. 역청은 시커먼 색깔이다. 이 방주에는 창문도 없다. 낮에도 방주에 들어가면 캄캄해진다. 이런 방주는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사람들은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많았다. 그 당시의 세상은 지금 보다 훨씬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방주는 시컴했던 것이다. 노아의 방주 안에는 흑암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의의 전파자를 따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창조된 아름다운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내 식구의 성공, 아름다운 우리 집, 행복한 상황,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마귀가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사단은 속이는 자이다. 그리고 지옥으로 데려간다. 노아의 당시 부모와 형제들도 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하나님이 아름다운 자연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예배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아는 『백이십년이 차면 다 망하리라』라고 외쳤다.『하나님이 진노하신다』라고 외치면서 시컴한 방주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방주 만이 유일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드리는 사람에게만 방주가 사랑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이신 것이다. 방주에 들어가는 자만 살아남았듯이, 십자가와 연합되는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지만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다. 십자가가 시커먼 방주처럼 되기를 바라는 자만이 십자가로 들어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회개없는 사랑의 하나님 만을 추구한다면 시커먼 방주가 없는 교회, 아름답게 창조된 모습의 교회 만이 있을 뿐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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