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시작
종교개혁의 시작, 루터의 95개 반박문
회개을 외쳐야 할 마지막 세대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가 선포한 95개 조항이었다. 1517년 10월에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를 비판하는 그 반박문을 3개 써서 하나는 그가 사역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내에 있는 교회 정문에 붙였고 또 하나는 교황의 직속 수하였던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알베르토에게 보냈으며 세 번째 복사본은 브란덴부르크의 감독에게 보냈다. 당시 교황은 마인츠 성당 출신이었기에 마인츠 대주교는 루터에게 받은 95개 반박문을 로마 교황청으로 즉시 보냈고 교황 레오 10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책임자를 통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던 슈타우피츠에게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의 입장을 철회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 해 말 수많은 진짜 그리스도인의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 종교재판소를 주도했던 도미니쿠스 종단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루터에 대한 106개 반박논문이 테첼에 의해 쓰여졌고 1518년 1월에 테첼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쿠스 총회에서 발표하였다.
결국 루터는 1518년 봄 7명의 선제후(先諸候, 라틴어 Princeps Elector의 번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택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 중에 프리드리히(Frederick)의 보호하에 40개 항목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총회에서의 논쟁을 위해 다시 제출하였다. 그 사이 95개 조항을 발표한 지 보름만에 라틴어와 독일어로 전 유럽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암흑시대 천년을 주도했던 로마 카톨릭의 거짓된 구원의 교리에 저항(protest, 프로테스트)했던 종교개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때 루터는 겨우 34살이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6년 전에 28살의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이어 신학박사가 되어 29살이 되던 1513년부터 2년동안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 입각한 시편을 강의하며 구약에 감추인 복음을 찾아내었다. 이어서 1515년 10월부터 1년동안 로마서를 강의하였고 1516년에는 동시에 갈라디아서를 강의하였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이라는 율법 외에 바울로부터 배운 로마서의 복음이었다.
중세 천년의 암흑시대를 깨웠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이 된 루터가 쓴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이렇게 준비되었다. 그 내용은 면죄부를 반박하는 목적이었다. 로마 카톨릭은 그 때나 지금이나 트렌트공의회(1545~63)에서 확정된 대로 7가지 성례전이 있다. 첫번째가 세례이고 네번째 고해성사(告解聖事, Penance)가 면죄부와 연옥과 연결되어있다. 죄를 범하면 죄책(guilt)을 가져오고 형벌(poena)을 일으킨다. 그 때 죄책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속하게 되는데 세상적인 형벌은 선행과 성지순례, 고행 나아가 면죄부를 통해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필수적인 요소이고 그 중에 면죄부가 결정적인 수단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면죄부의 기원은 AD 300년 경에도 있었는데 중세 십자군 전쟁에 와서 참전용사들에게 면죄를 허락되다가 1095년 우르반 2세 교황은 오히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고해성사에 해당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다가 1343년 교황 클레멘트 6세는 면죄부가 은행에 예치된 자본처럼 모든 성도들의 형벌을 보상해주는 잉여공로설을 칙서로 선포하였다. 면죄부 판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루터가 죄로부터의 참 구원을 주는 복음을 깨달을 때까지.
면죄부를 비판하기 위해 쓴 95개 조항은 무슨 내용일까. 첫번째 조항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라(마4:17), 전 생애를 회개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항은 회개가 사제에 의해 행해지는 고해성사와 사죄의 선포가 아니다. 세 번째 조항은 회개는 내적인 회개가 아니라 외적인 행위를 수반한다. 넷째 조항은 진정한 내적 회개인 자기 부인은 천국에 들어갈때까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95번째 조항은 천국은 거짓된 평화의 안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환난을 통해서(행14:22) 들어간다는 말씀으로 마친다. 이렇게 95개 조항을 통해 교황이 허용한 면죄부로 인한 사죄권을 반박했다.
지난 세기에 세계 선교를 주도했던 영국이 100년도 채우기 전에 기독교인이 전체 국민의 2%밖에 안되는데 모슬렘은 8%가 넘는 나라가 되었다. 영국은 이제 기독교국가가 아니라 모슬렘국가가 되어버렸다. 루터처럼 구원에 이르는 진짜 회개를 외쳤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100년 전에 영국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2%밖에 안된다고 기록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에는 예수 없는 교회, 지옥없는 천국, 회개없는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난 세기의 청교도들은 이미 말했었다.
그 후 세계선교의 주도권은 청교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그 미국도 겨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회개(Repent)없는 구원, 영접(Receive)만해도 되는 복음을 개발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많은 환난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예배를 통해 들어가는 복음이 면죄부처럼 판매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보다 더 부담없는 영접기도가 현대교회의 구원을 주도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거짓 구원, 고해성사와 면죄부를 반박했던 루터처럼, 루터의 후예들이 만들어낸 편리한 영접기도를 반박할 마지막 세대의 프로테스탄트들이 등장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
회개을 외쳐야 할 마지막 세대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가 선포한 95개 조항이었다. 1517년 10월에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를 비판하는 그 반박문을 3개 써서 하나는 그가 사역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내에 있는 교회 정문에 붙였고 또 하나는 교황의 직속 수하였던 마인츠(Mainz)의 대주교 알베르토에게 보냈으며 세 번째 복사본은 브란덴부르크의 감독에게 보냈다. 당시 교황은 마인츠 성당 출신이었기에 마인츠 대주교는 루터에게 받은 95개 반박문을 로마 교황청으로 즉시 보냈고 교황 레오 10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책임자를 통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던 슈타우피츠에게 비텐베르크의 수도사 루터의 입장을 철회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 해 말 수많은 진짜 그리스도인의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 종교재판소를 주도했던 도미니쿠스 종단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루터에 대한 106개 반박논문이 테첼에 의해 쓰여졌고 1518년 1월에 테첼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도미니쿠스 총회에서 발표하였다.
결국 루터는 1518년 봄 7명의 선제후(先諸候, 라틴어 Princeps Elector의 번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택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선거인단) 중에 프리드리히(Frederick)의 보호하에 40개 항목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총회에서의 논쟁을 위해 다시 제출하였다. 그 사이 95개 조항을 발표한 지 보름만에 라틴어와 독일어로 전 유럽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암흑시대 천년을 주도했던 로마 카톨릭의 거짓된 구원의 교리에 저항(protest, 프로테스트)했던 종교개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 때 루터는 겨우 34살이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6년 전에 28살의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고 이어 신학박사가 되어 29살이 되던 1513년부터 2년동안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에 입각한 시편을 강의하며 구약에 감추인 복음을 찾아내었다. 이어서 1515년 10월부터 1년동안 로마서를 강의하였고 1516년에는 동시에 갈라디아서를 강의하였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이라는 율법 외에 바울로부터 배운 로마서의 복음이었다.
중세 천년의 암흑시대를 깨웠던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의 시작이 된 루터가 쓴 95개 조항의 반박문은 이렇게 준비되었다. 그 내용은 면죄부를 반박하는 목적이었다. 로마 카톨릭은 그 때나 지금이나 트렌트공의회(1545~63)에서 확정된 대로 7가지 성례전이 있다. 첫번째가 세례이고 네번째 고해성사(告解聖事, Penance)가 면죄부와 연옥과 연결되어있다. 죄를 범하면 죄책(guilt)을 가져오고 형벌(poena)을 일으킨다. 그 때 죄책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속하게 되는데 세상적인 형벌은 선행과 성지순례, 고행 나아가 면죄부를 통해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선행은 필수적인 요소이고 그 중에 면죄부가 결정적인 수단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면죄부의 기원은 AD 300년 경에도 있었는데 중세 십자군 전쟁에 와서 참전용사들에게 면죄를 허락되다가 1095년 우르반 2세 교황은 오히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고해성사에 해당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다가 1343년 교황 클레멘트 6세는 면죄부가 은행에 예치된 자본처럼 모든 성도들의 형벌을 보상해주는 잉여공로설을 칙서로 선포하였다. 면죄부 판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루터가 죄로부터의 참 구원을 주는 복음을 깨달을 때까지.
면죄부를 비판하기 위해 쓴 95개 조항은 무슨 내용일까. 첫번째 조항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라(마4:17), 전 생애를 회개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항은 회개가 사제에 의해 행해지는 고해성사와 사죄의 선포가 아니다. 세 번째 조항은 회개는 내적인 회개가 아니라 외적인 행위를 수반한다. 넷째 조항은 진정한 내적 회개인 자기 부인은 천국에 들어갈때까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95번째 조항은 천국은 거짓된 평화의 안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많은 환난을 통해서(행14:22) 들어간다는 말씀으로 마친다. 이렇게 95개 조항을 통해 교황이 허용한 면죄부로 인한 사죄권을 반박했다.
지난 세기에 세계 선교를 주도했던 영국이 100년도 채우기 전에 기독교인이 전체 국민의 2%밖에 안되는데 모슬렘은 8%가 넘는 나라가 되었다. 영국은 이제 기독교국가가 아니라 모슬렘국가가 되어버렸다. 루터처럼 구원에 이르는 진짜 회개를 외쳤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100년 전에 영국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2%밖에 안된다고 기록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에는 예수 없는 교회, 지옥없는 천국, 회개없는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난 세기의 청교도들은 이미 말했었다.
그 후 세계선교의 주도권은 청교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그 미국도 겨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회개(Repent)없는 구원, 영접(Receive)만해도 되는 복음을 개발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많은 환난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예배를 통해 들어가는 복음이 면죄부처럼 판매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보다 더 부담없는 영접기도가 현대교회의 구원을 주도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의 거짓 구원, 고해성사와 면죄부를 반박했던 루터처럼, 루터의 후예들이 만들어낸 편리한 영접기도를 반박할 마지막 세대의 프로테스탄트들이 등장해야 할 때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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