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재산을 상속해 달라고 했는데, 아버지로 부터 재산을 상속받아 나가서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다 날린 아들의 이야기이다. 아들이 재산을 다 날린 다음에 다른 나라의 돼지를 키우는 곳에서 쥐염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았다. 그때 기억난 것이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품꾼들은 이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한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더니 아버지는 혼내지도 않고 뛰어가서 입을 맞추고 안아주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반응은『나는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 말하기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여기소서』 그런데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신발을 신기게 하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교회사람들은 이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요한복음 3장 16절과 함께 사람들이 좋아하는 귀절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15장 1-3절에서『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신앙인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가장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는 사람은 세리였다. 모든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께 나왔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수근거렸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을 받아드린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탕자의 비유이다.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다. 탕자가 돌아온 뒤 잔치를 준비하는데, 큰 아들은 바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고 돌아온 뒤에 보니까 사건이 벌어져 있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안 것이다. 큰 아들이 잔치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본다. 너의 동생이 돌아왔으니 잔치를 한다는 말을 듣게된다. 큰 아들이 노하여 집에 돌아가기를 거부한 것이다. 큰 아들은 죄를 짓지 않았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축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아들이다. 큰 아들의 삶에 대해 비난할 것이 없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교회 안에 큰 아들이 많다. 그런데 그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없다. 복음을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서 비난 받을 사람이 교회에 왔을 때, 그들을 받아드리는 것을 정말 힘들어 할 것이다. 교회에는 세상에서 정죄받는 사람들이 오기가 쉽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은 못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고 한다. 죄인들은 주님이 받아주지 않는다. 베드로전서에서『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는데, 경건치 아니한 자가 어디에 사리요』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회개케 하러 오셨다. 교회에서 우리도 이렇게 행동하려면 거듭난 삶이 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세리와 죄인들이 오니까『왜 저들을 영접해서 밥을 먹게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큰 아들은『스스로 집에 들어오기를 즐겨 아니하였다』 라고 하신 것이다.
돌아온 탕자에서 큰 아들이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 의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다. 자기 의는 죄인들 앞에서 들어난다.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의는 아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다면 율법화되는 것이 바로 자기의 의다. 자기의 의는 자기가 기준이 되고 율법이 되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므로 자기가 하나님이다.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하신 이유는 큰 아들과 같은 자들 때문이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람들 중에 신앙생활에는 열심히 하지만 자기가 주인인 사람이 바로 큰 아들과 같은 사람이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절대 알 수 없다.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였다. 첫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이다.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99%의 예배보다 1%의 전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방인을 하나님께서 받을 수 있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했다. 제물없는 제사는 없듯이 복음 전도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는 말이다.
두번째 비유는 한 여자가 집 안에서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등불을 켜서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누가복음 15장 9-10절에서『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여기에서 여자는 교회를 말하고 등불은 성령을 말한다.

세번째 비유가 바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회개하면 기뻐한다는 말은 없다. 15장 32절에서『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첫번째와 두번째의 비유는 잃은 것을 찾았다는 회개의 비유인데, 세번째의 비유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비유이다. 즉 거듭남을 말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을 영접할 수 없다. 성령이 하시는 역사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두번째 비유에서 동전은 바로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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