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온 후로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오늘날에는 주님을 영접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죄 사함이 아니라 주님이 예수의 피로 우리를 사는 것이다. 속량이 죄사함이다. 속량은 주님의 것이 된다. 이 말이 29절의 말씀이다.『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그리스도의 것이 바로 크리스찬이다. 내가 예수 믿어서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 크리스찬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 바로 세례다. 세례는 예수님이 핏값을 주고 우리를 사신 것이다. 주님이 핏값을 주고 사는 자는 회개하는 자를 말한다. 주님이 사는 자는 자기 생명을 주신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여있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못견딘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있기 때문이다. 계시된 믿음은 하늘로 부터 온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궁금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창세기 17장 17-18절에서『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절에서『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삭은『웃었다』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웃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름을 이삭이라 지어준 것이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많은 경험과 체험을 했지만 자기 속에서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겨자씨 만큼이나 작아도 응답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놀라운 경험을 했지만 그것이 바로 구원의 징표는 아닌 것이다. 구원은 단 하나 우리의 내적인 생명의 변화이다. 아브라함에는 불가능한 생명이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예수믿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적 생명이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믿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겠다고 하는데, 안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삭을 주시겠다고 한 후에『할례를 행해라』라고 하셨다. 할례는 육신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육신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이다. 육신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육신을 따라 사는 자가 되고, 반드시 영이 죽게된다. 구원은 내적인 생명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상 일이 아무리 잘되어도 기쁨의 원천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스마엘이나 살게하소서』이 귀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잘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다. 마가복음 9장 24절에서 귀신들린 아이가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시고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을 하고 있다.『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후에『나의 믿음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믿음은 지식 만의 요소가 아니다.『내가 믿나이다』라는 말은 큰 소리로 울면서 말하는 감정과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다 부숴질 때 혼과 영이 찔러 쪼개지는 것이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영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뚫고 주님의 음성이 죽어있는 영에 들어가면 거듭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이『내 말은 생명이니라』그리고『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하셨다. 그런데『내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보통의믿음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지식 감정 의지의 영역에 묶여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아무도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의지하게 되어 있다. 자신을 의지할 수 없는 만큼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게 된다. 아브라함이 자기 몸의 상태를 보고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믿었기 때문에 믿음이 죽어버린 것이다. 『내가 어찌 자식을 낳으리요』자기를 믿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으면서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두움에 속해있는 것이다. 이 어두움에 속해 있는 내면에는 자아가 둘러싸고 있다. 경험과 감정(두려움)과 의지의 자아가 영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믿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회개는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반성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으나 회개의 본질은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는데도 믿지 못하는 자는 회개해야 한다는 말이다.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하는 자는 진짜 회개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서 죄의 결과 만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하는 자는 매일 매일 계속 죄를 지을 것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마다 짓는 죄를 회개할 것이 아니라『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친 사도바울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