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깨닫지 못하게 하여

마가복음 4장 12절에서 예수님이『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마가복음 4장 12절 앞 장에는 네가지 밭의 비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길가 밭에 하나님 말씀이 뿌려진 밭은 새가 와서 길 가 위에 있는 씨앗을 쪼아 먹는다. 길가의 새는 마귀라고 했다. 두번째 밭은 돌짝 밭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는 졌는데, 돌이 있어서 씨앗이 깊히 자라지 못해 해가 뜰 때 말라버리는데,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환란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못이기는 이유는 땅 속의 돌을 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세번째 밭은 가시떨기 밭은 비유인데, 하나님 말씀이 뿌려는 졌지만, 가시떨기를 뽑지 않아서 자라지 못했다. 가시떨기는 세상의 재물의 유혹과 염려를 말한다. 위의 것들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 네번째는 좋은 밭이다. 거기에서만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을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한 후에 마가복음 4장 12절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하는 이유는 감출 사람에게는 감춘다는 말씀이다. 주님이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교회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귀절은 회개한 사람만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니골라당을 미워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미워하노라』 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진노하시는 것이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죄와 허물로 죽어있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있다. 우리에게 하늘의 빛이 비춰서 이런 실체가 보여지는 은혜가 있어야 하겠다. 세상의 사람들은 스스로가 선하다고 생각한다.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다. 광야에서 40년간 맛나를 먹이시고 생명을 유지시켜 주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드러난 것은 그들의 불순종과 허물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다. 인간이 지켜야 할 기준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들은 예배가운데 순종으로 주님이 함께 하셨다. 그들이 이길 수 없는 적을 주님으로 인해서 이겼다. 그들에게는 예배가 있고 하나님 말씀을 받드는 제사장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타락했던 것이다. 예배가 쉰 적이 없고 말씀이 없는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타락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셨다. 선지자들은『너희가 보고 있는 말씀에 의하면 너희는 회개해야만 해』라고 외쳤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전적 타락의 모습이다. 평생 성경을 보고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의 사람을 돌로 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멸망할 때까지 선지자들을 계속 보냈는데, 그들은 아무도 자기네 나라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통한 모든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상태가 이렇다 라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회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그리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님은『모른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구약시대의 충격이 지금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주님은 우리의 열매를 보고 안다고 말씀하신다. 열매가 없는 나무는 잎사귀가 무성해도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다 구원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회개하지 않은채 믿고 있다는 증거이다. 회개하지 않고 착실히 믿고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은 주님과 연합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사는 것이다. 기도 응답이 거의 되지 않는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영적인 상태이다.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일 것이다. 자기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신인 것이다.
아브라함도 성경을 통해서 보면 구원의 확증에 대한 이야기 보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약에서 해설이 없다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도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구원의 과정없이 구원의 확신 만을 원한다. 이것이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셈이다. 인간이 좋아하는 것 만을 가르치는 것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가르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현실 속에는 회개가 없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치유가 있었다. 그래서 기도원이 있었다. 전심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이제는 치유도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대적한 혼이요, 마귀의 생각인 것이다. 미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미혹이다. 우리가 네가지 밭 중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길은 좋은 밭이 아니면 회개해야 할 밭이라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전적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적인 것이 죽는 것이 회개이다. 세상의 죄는 겉으로 나타난 피부의 염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피부의 염증을 일으키게 만드는 독소라는 사실이다. 독소를 만드는 균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피부 약을 발라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죄를 회개해도 자아가 죽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요한1서 2장 15-16절과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 말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자아(옛사람)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야서에서는『사람들이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은채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한다. 주님은 아무나 죄사함을 주지 않는다. 회개하는 자만 죄사함을 주시는 것이다. 돌짝과 가시를 제거하는 자만 씨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성경은『회개하라』라고 명령하시고 주님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다. 회개는 주님이 도와주셔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믿음은 거꾸로 되어있다.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회개 뿐이다. 회개는 사람들이 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회개를 외치면 세상에서 잘못 살았던 행위를 생각한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바로 마귀에게 잡혀있는 죄성이다. 그것이 아니라 아예 육적인 자아가 죽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 만을 주님이 마귀로 부터 건져주신다. 이것이 구속이고 속량이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는 것이다. 나를 건져내기 위해서 생명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수님 만을 위해서 살게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 믿음의 열매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회개다.

마지막 때의 교회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다.『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가 토하여 내치리라. 너희가 부요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가난한 자라』오늘날 대부분 교회는 세상 기준을 가지고 있다. 세상 기준으로『부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님 보시기에는『가난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너희는 내게서 불로 단련한 금을 사라』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지 않는다. 『사라』는 말씀이다. 믿음은 선물이지만 회개는 아니다. 회개는 자아가 죽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흰옷을 사서 입어 부끄러운 수치를 면하라 안약을 사서 보게 하라』 여기까지가 회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열심을 내어서 회개하라』 라고 하셨다. 회개는 우리가 열심을 내어 해야한다. 아니면 주님이 문 밖에서 두드린다고 하셨다.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이미 믿기 때문에 회개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육적인 자아가 죽지않으면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23-24절에서『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십자가가 계시되기 전에는 아무도 회개했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여전히 구약시대에 살고 있는 자들이다. 자기의 육신적 자아를 믿는다면 이는 십자가의 계시가 없는 자를 말한다.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기까지의 상태를 말한다.『나는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베드로 자신이 주인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계시되기 전에는 다 내가 주인인 셈이다. 나를 믿은 다음에 예수도 믿는 것이다. 첫번째가 나의 생각이다. 두번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이다. 첫번째 내 계획대로 내 판단대로 살면서, 예수도 따르는 것이다. 십자가가 내 삶에 계시된 것이 아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계시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회개하는 자에게만 계시되는 것이다. 회개하지도 않은채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믿는 것은 가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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