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마가복음 4장 11-12절에『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마가복음 4장 12절 앞에는 네가지 밭의 비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 중에서 첫번째의 밭이 길가 밭인데, 새가 와서 뿌려진 씨를 쪼아 먹었다고 말한다. 새는 마귀를 나타낸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들어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심리학적 이유가 아니라 영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리지 않게 한다. 우리가 머리가 나쁘거나 감정적으로 부딪히기 때문이 아니라 마귀가 최우선으로 성경 말씀을 왜곡되게 하거나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교세 확장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 건물의 크기, 교인들의 수에 많은 신경을 쓰지 교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회개하여 거듭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쓰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마귀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평생의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다면 마귀에게 속는 것이다. 성경에는 재물을 지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하였다.
두번째 밭은 돌짝 밭인데, 그 밭 안에 돌을 기경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핍박이 올 때 넘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지킬 때 어려움이 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는 하늘의 축복이 주어진다고 한다. 끝까지 지킬 때는 어려움이 오게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넘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밭의 돌을 기경하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회개없는 밭은 말씀의 씨가 영생에 이르도록 자라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세번째의 밭은 가시떨기의 밭이다. 말씀은 심겼는데, 가시떨기를 제하지 않고 씨를 심은 것이다. 가시떨기는 빨리 자란다. 재물의 유혹과 세상의 염려가 말씀의 씨를 자라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래서 낙심하므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게 다름아닌 재물이 신이라는 말이다. 재물이 필요 이상으로 넘치면 반드시 탐심으로 발전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필요할 때 항상 공급하신다』는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여분의 재물을 만들려고 하고 이것을 의지하게 된다. 재물은 일에 유익하지만 영혼을 위해서 유익한 것은 아니다.
네번째의 밭은 좋은 밭이다. 이 밭은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하는데, 그 씨앗이 스스로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이 밭만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말씀을 전한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신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구원받는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4장 12절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셨다.『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받게 한다 라는 말과 배치되는 말씀이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등불을 준비해도 다른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자는 꺼진 후에 주님이 오신다. 그래서 구별하신다. 주님은 자기의 신부를 구별하신다. 이것이 거룩함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여 불뱀에 물려 죽도록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이시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는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하신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 살게하셨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회개하는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신다. 돌이킨 자만 죄사함을 받는데, 오늘날에는 예수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믿음은 인간이 결단하여 믿는 믿음이 대세다. 이 믿음은 회개할 때까지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 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여 믿는 믿음은 이스마엘을 낳고 만다. 자기 속에서 생산한 이스마엘을 죄성 때문에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때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거듭나지 못한다. 평생 교회를 다녀도 자기를 신뢰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2장 32절에서『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돌이킨 후에 라는 말은 거듭난 후에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데, 그러나 회개하지 않았다. 즉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했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툰 것을 본다. 육신은 이렇게 되어간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는『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 부터 이를 것이요』회개하면 돌이켜지는 것이다. 회개 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주님이 해 주실 것이다. 회개없는 돌이킴은 없다. 회개없이 인간 스스로 돌이키면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그 분의 피 공로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으면 이스마엘을 낳는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삭이라는 새 생명은 주님으로 부터 얻어야만 한다. 이 믿음은 회개하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회개하여 세례를 받는다(거듭남). 회개없는 세례는 하나의 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듣는『날마다 회개하는』말은 거의 죄를 면피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회개의 본질을 흐려놓은 결과일 것이다. 세례는 예수와 연합된 자를 하나님이 예수를 무덤에서 친히 일으키신 것 처럼 우리를 부활 생명으로 일으키신 다는 말이다. 이것이 거듭난다는 말이다.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고 다시 태어나려면 전에 것은 죽어야만 한다. 육적인 자아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회개는 바로 육적인 자아가 바로 마귀의 화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다 미혹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거듭나는 믿음은 마음의 할례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할례는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의 완성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내년에 네게 자녀를 주리라』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믿지 않았다. 육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육신은 이스마엘에게 잡혀있기 때문이다.『이스마엘이나 살게하소서 내가 백세가 되었는데, 어찌 자녀를 낳으리요』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아브라함을 본다.
육적인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육적인 아브라함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삭을 얻기까지의 아브라함의 25년간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믿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냥 믿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믿음은 허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은 예수와 연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모두 자기가 주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지만 자기가 주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주인인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예수를 믿고 있는 셈이다. 말씀의 빛이 비춰져서 내 속에 주인이 누구인가 밝히 드러난다면 큰 은혜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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