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누가복음13장23-24절에서『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이 말씀은 마태복음에서도 언급된다.『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온갖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한 것이며,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구원을 얻는 자가 적습니까?』라고 질문하니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좁은 문은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는 말이며, 나중에 들어가고 싶어도 안받아 준다는 말씀이다. 들어가기를 구하는 사람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열처녀 비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25절에서는『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열처녀는 모두 다 같은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등불이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등불을 킨 것은 같지만 내적으로 다른 기름통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이다. 마태복음에는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는 좁은 문 앞에 선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찾는 이가 많은, 넓은 문에 대해서는 아예 말씀하지 않고 있다. 열처녀와 같이 좁은 문으로만 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미련한 다섯처녀는 좁은 문으로 갔지만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은 사람들이다. 힘쓰지 않은 동안에 문이 닫혀버렸다. 지금 좁은 문 앞에 있는데, 예수님이『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하셨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해야지 사랑의 하나님이 맞으신가? 하나님은 심판자의 모습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구원자와 심판자의 모습은 하나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오직 회개하는 자만이 하나님은 구원자와 심판자와 동일하게 적용된다. 회개하는 자만이 사랑의 하나님과 의의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 믿기만 하는 자는 의의 하나님만 적용되는 것이다.
누구든지『예수 믿으면 다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전하지만 이것은 가짜이다. 중세 때 처럼 오늘날도 영적 암흑의 시대를 맞고 있다. 지금은 중세 때 보다 더 어두움에 처해 있다. 등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 가? 등불이 꺼져있는 다섯 처녀에게 예수님은『나는 너희들을 모른다』라고 답한다는 것이다. 기름을 다시 넣고 하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거듭남의 문제인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인데, 다시 태어나려면 이전 것은 죽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전 것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로 비롯된 자아의 문제이다. 육체로 비롯된 자아는 요한1서 2장 15절에서 언급되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말한다. 다시 태어난 자는 하늘로 부터 온 자인데, 세상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자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나 100세 까지 25년간이 거듭나지 못한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는 우리는 환경적 체험을 통해서 믿음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내적 변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가복음 13장 26-27절에는 예수님이『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이들이 행악자라 는 말씀이다. 행악자는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자라는 말이다. 세상에서는 성실하고 착실하고 좋게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거듭나지 않으면 이런 자라는 말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던 때의 말과 동일한 것이다. 하갈을 취한 것은 혈통으로 난 자를 말한다. 갈라디아서를 빌려 말하자면 이스마엘은 율법을 지켜서 태어난 자를 말한다.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가려고 하는 자를 말한다. 오늘날에도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십계명을 통해서 자기가 죄를 짓는지 안짓는지 살펴보면서 스스로 의인인지 아닌지 살펴보려는 자들이 많다. 자기가 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의 행동이다. 죄를 짓는지 안짓는지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자아(옛사람)가 죽었는지 안죽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구원의 내적 증거이다. 왜냐하면 옛사람은 옛뱀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옛뱀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옛뱀은 죽여야만 한다. 옛사람에 머무는 자는 뱀의 독이 퍼져있는 자이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는다. 타락한 자아가 죽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서 다시 태어나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니고데모는『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에 아들을 낳으리라 라고 말하니까『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율법(이스마엘) 아래 매인 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주신 이삭(씨의 약속)의 생명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