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바울은 다메섹에서 정오의 태양 빛 보다 밝은 빛이 비치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된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바울이 추구한 것은 또 다른 음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다. 천지창조보다 위대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단에게 넘겨진 창조된 것을 새롭게 하는 시작이 십자가의 죽죽으심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그 결과이다. 부활과 승천은 정상으로의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원래 죽을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분의 부활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계시록에서는 죽임당한 어린양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일반교회에서는 부활을 더 크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이 가장 놀라운 일인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은 절대 죽어서는 안될 분인데 죽으신 것이다. 바울이 추구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증인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부활을 설명하면서도 바울은『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면 그리고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죽으심을 본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활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날마다 죽노라』를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회개하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으심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놓치는 순간 미혹과 타락이 오게된다. 사단이 두려워하는 자는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고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사람이다.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 만을 두려워한다. 바울은 말한다.『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예수님이 십자가에서『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에게는 이 온전한 연합이 안되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 만이『다 이루었다』라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오직 십자가 뿐이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십자가의 도가 사단에게 내어준 육신을 처리하는 유일한 곳이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첫날 부터 예수님의 죽으심을 볼 때까지 기적을 가장 많이 본 자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었다. 그것을 믿는다고 변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삼년 동안 풍랑 위를 걷기도 해보았다. 그것은 풍랑 위에서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풍랑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배를 벗어난 베드로였다. 이것은 거의 자기 지성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이다. 말도 안되는 행동이었다. 물 하면 바로 물 속으로 빠지는 것이 이 세상의 진리인데, 베드로는 그 법칙도 벗어난 것이다. 보통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이 풍랑 위에 서있다고 우리가 함께 서있을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베드로는 믿었던 것이다. 베드로는『주여 만일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여 오라고 하소서』라고 했다. 주님이『오라』말했더니 베드로가 물 위로 나갔던 것이다. 외적인 순종은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오늘 밤에 다 나를 버리리라 라』고 말씀하니까 다 버리지 않는다고 고백했지만, 베드로는 세번 예수님을 부인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선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주님이 보시기에『나는 너의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말씀하신다. 『너의 선함은 내가 죽어야만 할 정도로 악해』라고 말씀하신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너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만 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것은 악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는 모든 것은 악이고 죄라는 말이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단이 자기가 중심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가 중심이 되는 모든 자는 악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선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마귀에게 붙잡힌 결과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것은 악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칭찬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비난일 것이다. 그래서 이 땅이 사단에 붙잡혀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온전히 이루었다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매일 매일 쫒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8-11절에서 말하고 있다.『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항상이라는 말은『날마다』라는 말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항상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회개할 일이 생길 때만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이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자는 죄만 회개하고 죄를 불러 일으키는 악의 존재인 자아를 부정하지 않는 자이다.『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자가 바로 회개하는 자이다.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임 당한 어린양 예수, 죽을 때까지 이 땅에 어떤 영적 체험을 하고, 계시를 받아도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복음보다 더 위대한 계시는 없다. 십자가의 죽으심보다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다면 이것이 미혹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는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전달될 뿐이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사람은 주님의 죽음 안에 거하는 자인 것이다. 주님의 죽음 안에 거하지 못한자는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성실히 잘한다 할지라도 구원은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회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나는 매일 죄를 회개한다』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저 죄만 용서받으려고 하는 행동에 불과하다. 주님의 죽음 안에 들어가는 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거듭나는 자는 십자가를 바라 보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말로는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지만 십자가에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자기를 믿고 있는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