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6-8절에『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나님을 보면 죽을 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는 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없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볼 수 있듯이 주님이 육체 안에 오셨다. 육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육체 때문에 볼 수 있다. 주님이 육체를 입고 오시지 않으시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형상이시다. 우리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 앞에 설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인생의 풍랑 앞에서 주님은『그래 그 풍랑을 해결할 수 있는 나야』라고 계시할 수 있지만, 또한『그 풍랑을 내가 준 것이야』라고도 계시할 수 있다.『이 풍랑을 통해서 전심으로 회개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원해』라고 말이다. 그런데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주님이 있다. 그것이 자기를 비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기에는 이견이 없다. 거기는 언제나 항상 볼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 나의 풍랑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주님 앞에 서있는가? 아니면『내 인생의 풍랑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구나 내가 전심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하는구나』라는 주님 앞에 서있는가? 하나는 주님이 내 편에서 풍랑을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주님이고, 또 하나는 풍랑 속에 서 계시는 주님이시다. 욥기에서 욥은『왜 이런 어려움이 내게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점점 욥은 깨닫게 된다.『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인생의 고통 속에서 함께 하시는구나 주님이 내 쪽이 아니라 내 반대 편에 서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알게된다. 주님이 욥에게 주신 것은 회개였다.
욥은 억울했다. 욥을 비판하는 친구들은『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의 친구의 말이 옳건 아니건, 주님은 욥이 먼저 회개하도록 원하신 것이다. 우리가 누구랑 부딪히건 간에 그 상대방의 비판이 맞건 틀리건 그것 따지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라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는 자에게 먼저 회개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바른 길이다.
주님은 라반을 변화시키려 한 적이 없고, 에서를 변화시키려 한 적이 없다. 주님은 야곱이 주님보다 더 의지하려는 야곱의 본성, 육신, 그 환도뼈를 치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건 주님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분별해야만 한다. 욥은 1장에서 자기는 악에서 떠난 자, 순전한 자 인줄 알았다. 자기 자식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1장이 끝나가기 전에 주님이 자식을 죽여버린다. 욥이 상상이나 한 주님이신가? 주님이 욥에게 알게하신 것은『나는 네 예배와 함께 하지 않아 네가 네 자식을 위해 기도한다면 나는 네 자식을 데려가』이런 주님을 누가 받아드리겠는가? 대부분 욥기 1장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욥은 온전한 자인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불완전하고 이기적이며 모순에 빠져있는데도 항상 주님은 내 편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 자기가 주인공처럼 생각한다. 모두가 에서가 아니라 라반이 아니라 야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소경이다. 내가 야곱이라면 주님은 나를 부숴버리고 그리고 나를 만드실 것이다. 우리는 고귀하게 상대방을 위해서 부르짖으며 중보 기도는 하면서 스스로 속이는 라반과 같은 자라는 말이다. 나는 바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말은 다 옳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에서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이 에서의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은가? 주님이 라반과 에서 사이에 나를 끼워 넣으셨다면 주님이 환도뼈를 치실 자는 바로 나라는 말이다. 오늘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라반과 에서와 같은 자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부숴질려고 하지 않는 나인가? 이게 바리새인의 외식이라는 말이다.
내가 야곱이라면 주님은 나를 부숴버릴 것이다. 빌립보 교회에 주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깨닫게 해 주신다. 바울은 능력의 주님을 구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 만을 집중한다. 바울은 삼층천을 보고 왔어도 다시 구하지 않았다. 다메섹에서 육신의 몸으로 영광의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 영광의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우편 보좌에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더 구하지 않았다. 성령 체험했다고 더 큰 성령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왜냐하면 십자가보다 성령을 더 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받아드리는 사람은 못박히신 예수만 바라본다. 우리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또는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이 세상에서 어떤 계시와 축복과 능력을 경험해도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보다 더한 감격은 없는 것이다. 어떤 축복, 어떤 행복, 어떤 성공을 받아도 주님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천국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지옥을 경험하셨다.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회개가 있다면 성령을 구할리가 없는 것이다. 성령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못박히신 예수를 위하여 부어주는 것이 성령이다.
사람들의 기준은 성령이다. 교회 안에서 성령과 은사의 기쁨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자의 증거이다. 우리는 교회에 무엇인가 채우러 나오는가? 아니면 비우러 나오는가? 성령을 구하는 자들은 채우러 나오지만 우리는 비우러 나와야 한다. 못박히신 예수가 나 때문에 못박히신 것을 안다면 그 앞에서 무엇을 채우려고 하겠는가?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시고 복종하셨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만난 영광의 주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사실상 환란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순교자가 로마 제국보다 오늘날이 훨씬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인구 밀도가 높아진 이유도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그렇다. 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예수 때문에 고난받고 순교하는 현장에 계실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너희는 내가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있을 때 내게 오지 않았다.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눈에 띄지 않은 자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런 자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아는 자는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감격하는 자 뿐이다. 십자가는 성령을 구하는 발판이 아니다. 성령이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영은 일곱 교회를 가리킨다. 주님의 성령은 교회의 영이다. 성령이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교회는 과연 얼마나 될까? 오늘날 은사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소홀히 하고 있다. 마귀는 원래 천사였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마귀가 된 것이다. 마귀와 천사는 같은 자였다. 마귀가 교회를 흔들고 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보좌의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못박히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들은 부족한 것에 기쁜 것으로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셨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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