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에 속한 지식과 영생의 소망

디도서 1장 1절에서『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자기의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신 것이다. 천사가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전도로 이 땅에 나타내시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천국가는 줄로 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중심이 된다. 자기가 믿음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 전체가 이렇게 보이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예수님이 등불을 켰는데도,『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은 등불을 켰는데도 문을 닫을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누가복음 13장에서『주님 구원을 받는 자가 적습니까?』라고 제자가 질문을 했더니『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라고 하셨다. 열고 대강 가는 것이 아니라『힘써라』고 했다.『그 날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주님이 자기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리라』라는 성경의 말씀이 생각난다.『내가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말과 상치되는 말씀이다. 등불을 켰다고 신부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내가 믿는다』라고 해도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도무지 모른다』라고 하실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등불을 켰고, 넓은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성경에서 좋게 보이는 말씀은 대개 끝에 쓰여져 있다.『내가 너희와 끝까지 함께 하리라』,『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많은 교회는 이런 말씀을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소개한다. 그러니까 잘못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내용부터 교회에서 설명하면 이런 잘못된 믿음이 시작될리가 없다. 그런데 믿음이 쉬워보이는 말 부터 하는 것을 본다. 예수님이 처음에 하신 말씀들『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으리라』라는 귀절부터 설명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에 하신 마지막 말씀은『그 날에 내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신다』고 했다. 그리고『내가 병들어 있을 때 길에 있을 때에 내게 오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씀 속에는 믿음이라는 귀절이 나오지 않는다. 행동에 대한 말이 있을 뿐이다.『우리가 언제 안했습니까?』그러니까 주님이『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사람들은 자기의 삶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들은 신앙생활도 잘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잘 돕고 한다. 그래도 못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너희는 염소야, 못들어가!』라고 말한 사람들은 자기들은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들어갈 수 있는 부류는 예수님이『내가 병들어 있을 때 길에 있을 때에 내게 와서 먹을 것을 주었다』라고 했을 때,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라고 되물었던 것이다. 『너희 중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확신하지 못한다고 천국 못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확신은 인간의 심리를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누가복음 13장 25절에서『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예수님이 이 말씀을『구원을 얻을 사람이 적습니까』라고 물어본 사람들에게『너희가』라고 말한 것이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26-27절에서『그 때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행악자는 회개하지 않은채 스스로 교회생활에 충실히 했다고 생각하는 자들일 것이다. 오늘날 사실 이 말씀이 복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 답을 찾아야 한다. 예전 육의 사람으로는 안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것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찾아야만 한다. 거듭남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 

유다서 1장 3절에서『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다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말하는데, 일반으로 얻은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구원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은 쉬운 길이 아닌데, 쉬운 길이라고 가르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믿는다고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만 천국 가는 것이다. 나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했다. 이게 좁은문이다. 이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받은 자가 성도다. 죄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단번에 거룩한 성도에게 주시는 믿음이다. 이게 거듭나는 믿음이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육적인 것이 죽지 않은 채로 살고있기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죄와 싸우려고 한다.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이 죽어야 한다. 하나님께로 부터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오늘과 내일의 죄를 생각하는 자는 여전히 육적인 것이 죽지 않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유다서 1장 5절에서『너희가 본래 범사를 다 알았으나 내가 너희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이 말씀도 어렵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칠하고 애굽을 나와 홍해바다를 건넌 사람들인데, 광야에서 믿지 않은 관계로 멸하셨다고 한다. 주님이 어린양의 피를 칠했다고『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리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성경은 언약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언약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다 약속을 했다고 믿는 것이다. 게다가 입으로 영원한 언약을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죽음의 언약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문이 닫히면 방주처럼 다시 열리지 않는다. 언약에는 사랑이 아니라 오직 육적 죽음 만이 있을 뿐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회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죄를 반성하는 것인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인가? 회개는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밖에 없는 엄청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육적인 것이 죽는것을 말한다. 죄를 반성하면 그 다음에는 죄를 안짓는가? 육적인 것이 죽지않는 한 죄는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모든 문제는 죄를 회개하면 의인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면서 죄를 면제받으려 한다. 육적인 것은 죽지 않으면서! 구약시대 죄인들은 어린양을 제사장에게 데려오면 안수하여 어린양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그런데 전가시킨 후 죄인과 어린양은 별개의 존재로 생각한 것이 잘못이다. 어린양이 죽지만 사실은 자기가 죽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에게 죄를 전가한 채 자기들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전가한 채, 예수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예수의 죽음과 함께 육적인 것이 죽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죽는 것은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내적으로 더러움에 차 있는 욕망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채우려고 한다. 주님은 우리의 더러움을 불 같은 연단으로 깨닫게 해 주시고 비우기를 원하신다. 

창세기 15장 1-2절에서『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이게 사람의 뜻이다. 아브라함이 롯을 데리고 나왔는데, 이것은 육정이다. 롯과 헤어진 것은 육정을 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육정을 버리니까 사람의 뜻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5-8절에서『그를 이끌고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요』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안믿어지는 것이다. 이때 주님이 9-10절에서 다시 말씀하신다.『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된 암소와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쪼갠다는 것은 히브리어 명사로 브리트(언약)라고 한다. 왜 쪼개라고 하는가? 이게 처음으로 하는 언약인 것이다. 쪼갠 후에 17-18절에서『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고』 

언약은 쌍방계약이다. 그런데 이 계약은 한쪽 만 서명한 것과 같다. 아브람에게는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게 안하시고 주님 만 지나가신 것이다. 예레미야 34장 18-20절을 보면『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매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이 쪼갠 언약은 생명을 건 언약이다. 이 언약을 세운 다음 언약을 어기면 원수의 손에 붙인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이상한 언약을 하셨다. 짐승을 쪼개고 죽였다.『나도 이 언약을 안지키면 내가 죽는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죽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언약을 안지키면 내 아들을 죽인다는 말이다. 네가 안 지키면 네 원수(마귀)의 손에 붙인다. 모든 언약은 죽느냐 사는냐의 언약이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는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갔던 이스라엘 방백과 환관들과 제사장은 언약을 어기면 너의 원수의 손에 붙인다고 했다. 

주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은 일방적 반쪽 언약이었다. 짐승을 쪼개고 횃불 사이로 주님이 일방적으로 들어가는 무조건적 언약이다. 만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브람에게 땅을 주지 않으면『나는 죽는다 내가 약속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 교회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구원받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방적, 무조건적으로 언약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불로 지난간 후에『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 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고』주님이 반드시 준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내가 죽는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아브람에게『너도 이 약속을 받지 않으면 너도 죽는다』라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일방적인 약속이지만 아브라함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 다음에 이스마엘을 낳는데, 그 다음에 언약을 또 한번 하게된다. 이 언약이 문제인 것이다. 출애굽기 이후에 출애굽기 2장 23-25절에서『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한 언약은 창세기 15장의 언약이 아니다. 창세기 17장 1-2절에서『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15장에서 언약을 일방적으로 세웠는데, 왜 다시 언약을 세우는 것인가? 15장 언약은 아브람이 불 사이로 지나가지 않은 것이다. 아브람이 비록 일방적인 언약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15장을 근거로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언약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실제 언약은 창세기 17장에서 서로 언약을 하는 것이다. 한쪽은 회개하는 자와 하나님이시다. 회개하는 자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야 한다. 17장 7절에서『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 되리라 나는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기억하신 언약은 바로 17장의 언약, 즉 쌍방 간의 언약인 것이다. 주님이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새 사람에게 하는 언약이다. 이게 거듭남의 언약인 것이다. 9-10절에서『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이 거듭나기 전의 아브람에게 하신 일방적 언약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듭난 자와의 언약이 아닌 것이다. 바로 17장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한 쌍방 간의 언약이 바로 구원의 언약이다. 쌍방 간의 언약이 바로 할례의 언약이었다.『양피를 베어라』는 말이다. 육신적인 것을 제거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육신 적인 것을 베어내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이것이 로마서 8장에서『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했다. 육신에 따라 사는 자는 주님이 죽여버리는 것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서 34장 18-20절에서 말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안지키면 이제 죽는다. 그런데 17장 17절에서『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회개하기 전에는 아무리 아브라함이라도 쌍방 간의 언약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17장에서 나오는 언약이 바로 신약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언약이다. 18절에서『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갈라디아서에서는 베어낼 것이 바로 이스마엘이라고 말한다. 이스마엘은 율법을 뜻한다. 율법을 베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게된다. 그렇다고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으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이삭이 성령으로 태어난 약속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생명 만이 새 언약이다. 

창세기 15장의 언약에 대해서 17장이 새 언약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다. 예수님의 피로 세운 언약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 입으로는 언약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15장의 언약을 손쉽게 받아드리는 것이다. 17장의 육적인 죽음은 피한채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생각하는 15장의 언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7장의 언약을 믿는다면 이제 쪼갠 송아지 사이로 들어간 것이다. 지난 번 15장의 언약에서는『내가(하나님)이 들어갔으니, 17장의 언약에서 이제는 네 차례야』라는 것이다.『이제부터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게된다』는 언약이다. 이 약속은 양피를 벗겨내듯이 육적인 것을 죽이는 것이다. 언약은 피차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이 언약은 모든 예수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에서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은 일방적인 15장을 생각하고 주님은 쌍방의 17장 언약을 기억하시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못지켰다. 하나님이 인간을 다 죽여야 하나 하나님도 약속을 못지키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이제 우리가『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가 되는 것이다. 길은 하나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길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와 같이 죽는 길 외에는 없다.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모리야 산에서『이삭을 바쳐라』그리고 주님은『네 아들을 쪼개라 같은 장소에서 나도 내 아들을 쪼갤거야』라고 하신 것이다.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내 앞에서 완전하라라』고 하신 후『너 아들을 제물로 바쳐라』라고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인 후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실 것을 완전하게 믿었으며,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하고 있다. 이것이 거듭남의 믿음인 것이다. 이게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약속을 하나님은 야곱과 하셨다. 얍복강에서 환도뼈를 부숴버린 것이다. 죽어야지 거듭나는 것이다. 그 날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된 날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날에 영원한 언약이 된 것이다. 영원한 언약은 피차에 못지키면 죽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 일치될 때 이 언약이 영원한 언약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나의 육적인 죽음 만이 이제 영원한 언약을 지키는 것이 되었다. 지키지 못하면 구원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이미 언약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다. 언약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 내 육적인 자아가 죽느냐 그대로 머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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