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창세기 32장 26절에서『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홀로 남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게된 이야기이다. 우리가 죽음처럼 홀로 주 앞에 서는 예배가 있을 때 주님은 만나주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 홀로 서는 날이 와야한다. 창세기 32장에서 그 때 주님은 어떤 사람을 보내셨다. 그래서 야곱과 씨름을 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바로 역사일 것이다. 바로 씨름을 하는 것이다.
야곱이 홀로 남게된 이유는 창세기 31장 3절에서『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20년 동안 라반 집에서 나그네처럼 광야 생활을 했다. 자기가 거할 땅이 아닌 곳에서 거의 20년 동안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20년 만에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그래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야곱이 얍복강까지 왔지만, 건너가면 그 조상의 땅인데,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홀로 남았다. 32장 1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말했다.『이들은 하나님의 군대』라 그래서 동네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사자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7절에서『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 반응하고 있다. 에서를 만나기 전에도 에서에게 반응한다. 이것이 바로 육신이라는 것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안되는 것이다. 육신은 상황에 반응한다. 육신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아도 소용이 없다. 육신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 체험을 하고 기도 응답을 체험하고, 예배가운데 임재를 경험했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우리는 변해야 한다』고 외치는 교회 사람이 있다면 가짜 복음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아는 자는 왜 육신적인 것이 죽어야 하는 가를 깨닫는 자이다. 이게 회개의 시작이다. 우리의 육신적인 것은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성화를 말한다. 육신적인 것은 변화의 대상이 아니라 죽음의 대상이다. 그래야 칭의가 있고 성화가 이루어진다.
오늘날 거짓 복음이 수많은 교회에 들어가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그 인간은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들었지만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라함은 야곱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하고 음성을 들었지만 안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25년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고 음성을 들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야곱이 얍복강에 왔는데, 주님이 보낸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다. 어떤 사람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씨름을 하는데, 야곱의 육신의 힘이 너무 센 것이다. 이 어떤 사람은 야곱의 힘의 근원, 환도뼈를 부숴 버린다. 그 때서야 야곱이 축복을 구했다. 우리가 육적인 것이 부숴졌을 때 주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놀랍게 그가 말한 것은 하나였다.『너 이름이 무엇이냐?』『야곱입니다』『지금부터 너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겨루어서 이겼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할 때 그 이전에 먼저 주님 앞에서 부숴져야 한다. 우리를 대적하는 적들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서 부숴져야 한다. 그것은 주님 보다 더 의지하는 힘의 근원이 부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축복이다. 그 때 해가 돋는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도다 우리 육신이 주님을 보면 죽는다. 그러나 부숴진 자가 주님을 만나면 변화받는다. 이게 회개한 자가 다시 태어나는 변화다. 회개는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육적인 것이 죽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3-6절에서『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말했다. 이 빛이 다메섹에서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주님 누구십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빛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 분이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이시요, 십자가에서 비춰진 빛을 말한다.
삼일 동안 바울은 소경이 되었다. 물도 마시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고 소경이 되었는데, 사도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구한 것이 아니라『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정말 부활하신 것이구나,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는구나』사도바울이 집중한 것은 못박히신 예수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못박히신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못박히신 예수와 연합된 것도 없는데,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 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령 체험했다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는 자들이 많은 것을 본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다 미혹이요 거짓말이다. 우리 옛사람은 주님을 만나면 죽는다. 로마서 6장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못박혀 죽은 예수를 만나는 것, 그리고 그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 구원이다. 성령이 이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못박혀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것 뿐이다. 그럴 때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요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의 결과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다. 이것이 브니엘의 체험이다. 야곱이 약속의 땅을 떠나 도망갈 때는 벧엘의 체험을 한다.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와서 주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체험한다. 그 때 돌기둥을 세우고『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다 두렵도다 여기가 하나님의 성전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20년이 지나서 벧엘의 체험을 했는데도 라반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이 20년 만에 말씀하셨다.『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제는 돌아가라』얍복강까지 왔는데, 약속의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에서에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육신이고 옛사람이다.
환도뼈가 위골되고 다리를 절게 되었다. 다리를 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에서를 만나면 죽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 33장 10절에서『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데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육신적인 것이 제거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부숴지지 않은 만큼 우리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34장에 가면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35장 1절에서『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야곱은 브니엘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름이 바뀌었고, 도망갈 때 체험했던 곳, 하나님의 집이라고 네가 이름 붙인 벧엘에서 만나자는 말씀이다. 그런데 야곱이 단을 쌓으러 갈 때, 2절에서『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했다. 2절에 가서야 비로소 주님께 돌이키는 자세가 나온 것이다. 그 동안은 야곱에게 이런 자세가 없었다. 벧엘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려고 준비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3절에서『우리가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그런데 6-7절에 와서 벧엘의 이름을 또 바꾼다.『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라』엘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을 뜻한다. 이제는 하나님의 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벧엘의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되고, 오직 주님에게 집중해야만 한다.

벧엘에 왔는데, 10절에서 하나님이『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만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13절에서는『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야곱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 땅에 내려와서 만나 주시고 올라가신 것이다. 그리고 벧엘에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확증해 주셨다. 이렇게 야곱이 부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이 죽는 회개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자 만이 진정한 세례, 야곱이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것 처럼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것을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 말한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예수님의 죽으심을 추구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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