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하셨으니

사도행전 17장 16-18절에『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이 이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라는 도시의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졌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되어서 이렇게 거룩한 마음이 생겨야 한다. 바울은 그 때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시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 철학자들과도 쟁론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은 다 이방인들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에서는 재물이라는 우상이 가득하다.
28-29절에서『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주님은 어떤 형상을 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형상을 만들면 그 곳에 신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런 존재다. 인간은 새긴 우상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주님은 가까이 있지만 주님은 영이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것에 있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인간이 지은 건물 안에 계시지 않으신다.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이며, 종교에 불과하다. 주님은 회개한 성도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구약시대 성막과 성전을 주셨다. 이것은 하늘의 모형이다. 주님이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에 거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나라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모형이다. 오늘날 성전이라고 말하는 건물에는 주님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4장 21절에서『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주님은 성도들의 마음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사도행전 17장 30절에『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회개가 복음이다. 교회 안에는 회개하지 않고 자칭 거룩한 성전이라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가득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교회만 가면 다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영접 기도 한번으로 구원 받았다고 한다. 철저히 자기를 위해서 살면서도 교회만 가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삶의 중심이 자기이면서, 스스로 성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물질과 성공과 번영을 위해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귀가 만든 미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때에 온 땅을 꿰는 마귀가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도 미혹케 한다고 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는 사형수와 같다. 불로 태워버릴 만큼 하나님에 대하여 악하다는 말이다. 사형수는 몸은 살아있지만 사실 죽은 자나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에 들어온 자만 사형을 면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사형수와 같은 행동을 하면서도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성도도 엄연히 하나님에 대해서 사형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성도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왜 이런 사실을 망각하는가? 자기 눈에 비친 세상에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요한1서 2장 15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예수님이 성경에서 마지막 때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했다. 롯의 때 4명이 소돔과 고모라의 무시무시한 죄로 부터 건짐을 받았다. 천사들이 4명을 끄집어 내어서 구원을 받았다. 물론 롯의 처는 도중에 소금 기둥이 되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지구 땅의 동성애, 마약 등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롯의 때를 신화나 전해오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성경은 미리 알려주신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으니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말이다. 예수님은『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다. 롯의 처는 죄의 심판으로 부터는 건짐을 받았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별되었으나 그것이 구원이 아님을 말한다. 뒤돌아 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고 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우리도 전진하다가 세상을 향하여 뒤를 돌아보는 자가 있는가?
구원의 핵심은 누가 주인인가 이다. 어떻게 주님은 롯의 처가 살았던 곳을 잠깐 돌아보았다고 소금 기둥을 만드시는가? 이것이 그렇게 큰 죄란 말인가? 그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기 때문이다. 주님은『나는 네가 세상을 향하여 돌아보는 것 싫다. 돌아보지 마라, 과거에 네가 살던 세상을 돌아보지 마라』라고 하신다. 주님은 소금 기둥을 만드시는 분이다. 광야에서『원망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길이 험하다고 원망했다. 주님은 불뱀을 보내서 물려 죽게 했다. 오늘도 주님을 원망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 것이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겠다. 내가 주인이 아니면 나는 주님의 노예다. 노예가 주인의 말에 불순종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repent)는 주님께 돌이키는 것이며,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육적인 것이 죽어야 주인이 바꿔진다. 그래서 회개는 육적인 것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곧 물로 심판하기 때문에 노아가 의의 도를 전했다. 의의 도를 전한 것은『회개하라』였다. 죄인인 인간은 의가 없지만 사람들은 사랑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성경은 사단(루시퍼)을 새벽별(금성)로 표현했다. 금성은 비너스(사랑의 신)이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랑의 신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라는 말은 요한1서에 나오는데, 초대 기독교에 첫 이단이 사랑을 외쳤기 때문에 요한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부터 난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 당시 교회에서 이단들이 말한 것은 사랑과 영을 말했다. 하나님께로 부터 나지도 않았는데, 사랑과 영을 외치는 것은 바로 사단이라는 말이다. 영과 진리를 말해야 하는데 영과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영은 진리의 영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한다. 죄인들은 의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교회도 사랑을 먼저 말할지도 모르겠다. 회개하는 자만 의가 필요한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래서 불의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르는 것이다. 회개 만이 살 길이다.
회개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야만 했는가, 이런 복음 앞에서만 인간이 회개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사랑 앞에서는 회개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온갖 물질적인 사랑을 준다하더라도 그것으로 회개하지 않는다. 회개는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뿐이다. 우리가 회개의 복음을 전하면 핍박이 오게된다. 마귀가 공격하는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떤 공격을 받거나 핍박을 받아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의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의가 정오의 태양처럼 밝아질 것이다. 회개가 어두움을 걷어낼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31절 바울이 아테네의 마지막 설교에서『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했다. 정하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은『내가 모든 사람을 이렇게 심판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랑이 아니라 심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사랑으로 비춰질 뿐이다. 십자가에 모든 인간의 육적인 죽음이 들어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이 십자가의 죽음이 사랑으로 비춰질 수 있는가? 십자가는 사형장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처형당해야 하는 사형수라는 말이다. 좀 섬뜩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게 사실이다. 방주는 심판이다. 물로 다 죽기 때문에 방주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안에만 사랑이다. 따라서 십자가에 우리의 육적인 죽음이 연합될 때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의가 없는 사랑은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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