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으로 얻은 구원
유다서 1장 3절『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일반으로 받은 구원은 동일한 구원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구원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구원은 동일하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기 직전 시간이 얼마 안남은 우편 강도나 죄수들이 다 도망간 것을 알고 스스로 자결하려고 하는 빌립보 간수에게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구원을 듣고자 했던 니고데모에게나 구원은 동일하다는 말이다. 삼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제자 베드로에게나 주님이 모르는 사람에게나 구원의 적용은 동일하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처럼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자는 구원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은택을 받은 자가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예수님과 자주 안 맏났던 사람에게는 구원이 어렵고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교회를 수 십년 동안 다닌 사람이 교회를 처음 나온 사람보다 구원의 기회가 더 빠를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다가 common salvation을 왜 쓰려고 했는지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시는 믿음을 내가 노력하고, 찾는다고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했다면 시간 낭비를 한 셈이다. 믿음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해서 찾는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간절히 찾으면 얻는 것인줄 생각하고 있다. 구원받는 믿음은 주님이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단번에 주신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절히 노력해서 얻으려고 할수록 이삭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얻는다.
그러나 모두에게 동일한 구원을 위해서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실 믿음을 위해서 힘써 싸워야 한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한다. 누구랑 싸워야 하는가? 사람들은 믿음을 얻기 위해서 더 많은 기도와 성경 공부에 더 매달리는 것을 본다. 하나님 말씀과 성경 지식에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 이런 발상 자체가 내가 주인인 셈이다. 이것이 아직 회개하지 않은 증거이다. 그래도『성경을 많이 보면 믿음을 위해서 그 만큼 도움이 될거야, 기도한 만큼 후회하지 않지』라고 생각한다. 그 것은 이 땅을 위한 삶에 불과하다. 하늘에서 주시겠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노력을 하는 만큼 믿음을 얻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된다. 노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 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도에게 한 번에 주신 믿음이 있다. 값없는 은혜다. 이것을 주님 앞에서 찾으려고 간절히 노력한 만큼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간절히 노력한 만큼 주님은 더 빨리 믿음을 주실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새벽기도도 나가고, 성경 일독을 수차례 하고, 집에서 정한 기도 시간도 있고, 그렇게 하면 고넬료처럼 그 만큼 더 빨리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교회다니는 사람들에게 지배하고 있는 마음이다. 이 유다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시는 믿음이 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막아져 왔던 것을 말한다.
『주여 믿음을 더 하소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런 말씀을 붙잡고 사는 오늘날의 교회 사람들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기도 응답을 받고, 풍랑 위에서 내가 힘써서 주님 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믿음이 주님이 주시는 믿음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믿음은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 다르다.『주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할 때 까지 주님이 주실 수 없는 믿음이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가지는 믿음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이다.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주님이 주시는 믿음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값없이 주님이 주시는 믿음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구나』라는 것을 고백해야만 한다.『내가 스스로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스스로와 싸우라』는 말이다.『나는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구나』라고, 이것이 회개의 근본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구원이 된다. 이렇게 고백할 때 값없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노력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값없는 은혜의 실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모든 교회 훌륭한 사람들은 엄청난 기도와 성격 지식으로 무장된 것을 보지 않는가? 그래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새벽 전 부터 부르짖는 것을 보지 않는가! 다윗이 도망다니는 중에서도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한 내용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가?』이 값없이 주시는 믿음의 은혜와 최선을 다해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믿음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두가지의 믿음이 만날 수 있는 때가 하나 있다.『내가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이구나, 노력한 만큼 약간 유익한 것도 절대 아니구나』라고 깨달을 때 그리고 고백할 때이다. 그것을 위하여 힘써 싸우지 않으면 유다서 1장 5절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사실 값없이 주시는 믿음의 은혜에 대해서는 성도들이 모르는 바가 아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많이 들어온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나게 하고 싶어서 유다가 하는 말이다.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유다도 알고, 유다가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그 대상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는 이유는 주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지만 광야에서 주님이 구원해 내신 백성을 멸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히브리서 3장 15-19절『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이 진노하신다. 그러나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항상 하나님은 나를 사랑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그러니까 이렇게 매일 맛나를 주시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를 지켜주시지』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매일 맛나를 주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비춰주시고 성막에서 모세에게 자기를 나타내 주셔도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모든 이에게 진노하신다. 아무리 이런 말씀을 잘 알고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사실 복음을 잘 모르는 것이다.
롯의 처를 기억해야 한다. 롯의 처는 수없이 많은 기적과 은혜를 체험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믿으려고 하는데도 부족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마귀가 회개할 기회를 막고 있다. 롯의 처는『천사가 나를 끄집어내다니』라고 감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은『이제부터』라는 말이다. 롯의 처는『뒤돌아 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소알성 만을 향해서 가라』이 말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롯은 이 말이 들어왔다. 그러나『주님, 나는 못합니다』라고 말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맛나를 먹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주님의 보호아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 때문에『나는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부패한 자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나를 순종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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