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우리는

로마서 6장 3절 에서 사도바울이 질문을 한다.『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바울의 서신이 일곱 개인데,『성령세례를 받으라』라는 말이 없다. 다 물세례가 무엇인지를 설명을 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축복과 성령충만에 빠져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물세례를 설명하고 있다. 물세례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 만이 구원의 시작이다.
물은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고 인정하여, 죄를 씻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기 전에는 구원이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집을 떠났지만 친척인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하나님은 믿어는져도, 온전한 순종은 나올 수 없다. 아브라함도 순종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받아 방언을 하고, 천사의 소리를 말하면 대단하게 여겨지고 구원받은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육적 죽음의 회개가 있는가 이다. 회개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25년 동안 전쟁도 이기고, 멜기세덱(재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신령한 영적인 존재를 만났지만 그가 떠난지 11년 만에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수 없는 나이가 될 때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우리가 사사로이『인간적인 방법을 써도 안되는구나 끝이구나』라고 생각할 때가 회개인 것이다.
『회개는 내 판단, 내 계획, 내가 원하는 것, 나로 부터 시작된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구나』깨달을 때 여기까지가 회개인 것이다. 오늘날 수십년을 교회다녀도 회개한 적이 없고, 회개의 의미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없는 자의 예배는 회칠한 무덤일 뿐이라고 한다.
로마서 6장 5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우리의 옛사람이 무덤에서 장사되는 것이 세례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단번에 즉시 영원히 얻는 구원이다. 예수님과 연합된 자는『이미 내가 죽은 자이구나』라고 인정하는 사람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새생명 즉 생명의 새로움을 얻는 것은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생명이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노아는 당대 의인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 하나님이 노아에게만 의의 말씀을 맡겼다. 그렇게 때문에 심판한다고 120년간 외쳤다. 노아의 부모와 형제, 친척들도 노아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주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니라』라고 하시면서 모든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뱀에 물린 자들이 바라볼 수 있는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통해서 뿐이다. 하나님은 그냥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그냥『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부르심을 받은 자가 많지만 택하심을 받은 자가 많지 않다』는 말을 하시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그 날에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못들어간다는 말이다.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다.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고, 방언과 예언기도를 하고, 능력을 행하고, 그런 통로가 되어도, 그게 그 사람이 회개하여 변화된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할 것이다. 주님은 마음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노아의 하나님이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나 다 동일하신 분이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변한 적이 없다. 우리도 그 당시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노아가 아니라 노아의 도를 받지 아니할 진노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하지,『믿음의 세례』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노아의 당시 내가 살았더라면 내가 예수 믿기로 했으니까 나는 노아의 말을 따르고 믿을 자가 될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으면서『내가 방주에 들어갈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건 세례가 아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어 장사되는 것이다. 우리는 방주에 못들어 가고 물 속에 수장된 사람들이다. 세례를 받을 때 물에 들어가는 의미가 바로 이런 뜻이다. 이것이 회개다.
우리는 주님이 건져주시지 않을 자들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요 세례다. 이것을 칼빈은『인간의 전적 타락』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탕자처럼 아버지에게 돌아갈 자가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다.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서 나오지만 14장에서는 주님이 잔치를 예비했는데,『다 일치하여 사양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모습이다.『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심히』라는 말은 치유될 수 없을 만큼 부패했다는 말이다.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노아의 당시, 노아와 가족 7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몰랐다. 복음이 선포되어도 몰랐다.
인간 죄의 마음은 컵에 담아둔 부패한 물과 같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부패한 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죄를 반성하고 예수의 피를 넣으서 깨끗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부패한 물은 버리고 다시 깨끗한 물로 채우지 않으면 깨끗해 질 수 없다. 먼저 부패한 물은 절대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부패한 물을 버려야만 한다. 이것이 회개다. 부패한 물을 버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자기라는 육적인 것이 죽는 것이다. 인간은 장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는 존재다. 선한 랍비 니고데모도 버렸다. 평생 교회를 다녀도 여기에 이르지 못하면 아직 아브라함이 99세에 이르지 못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된다. 아무리 교회를 성실하게 다녀도, 육적인 자아가 죽지 않고, 내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스스로 부패한 물을 버린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쌓은 신앙에 불과하다. 이것을 성경은 율법 아래 갇혀있다고 말한다.
주님이 아브라함을 긍휼히 여기신 이유는 그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 99세 때 나타나셔서『내년에 내가 자녀를 주리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었다. 믿음이 전혀 없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는데, 없어진 이유는 이스마엘 때문이었다. 육신인 이스마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못받는 것이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언약을 하셨지만 이스마엘과 같은 육은 그 언약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의 언약은 육적 죽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는 육적 죽음을 모른채 구원의 확신을 통해 천국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다. 거짓 구원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육적 죽음을 말하고 있는데, 육은 이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나의 정체성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가? 육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다. 사도바울은 바로 옛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고』라고 했다. 사도요한도 요한1서 2장 15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육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육을 이기기 위해 육적인 자아가 죽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노력으로 끝내려 한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이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지 못한다. 자기가 대략을 정하는 것이다. 내가 정한 방법대로 신앙 생활한다. 그래서 내가 정한 선은 넘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누가 주인인가? 내가 바로 신이고 우상이다. 이것은 어두움이다. 여기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정체성을 깨닫고 회개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된 자아의 죽음 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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