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신명기 8장 2-3절『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보면『두려워 말라』라고 하시는 말도 있고,『두려워 하라』는 말씀도 있다. 시험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시험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있고, 『시험한다』는 말씀도 있다. 성경을 보면 분간을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주님이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셨다. 그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애굽에 살면서 가나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이 땅에서의 승리였다. 가나안에 입성은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왕 밑에서 힘든 생활을 했다. 애굽 사람들은 뱀신을 믿고 있었다. 파라오의 이마에는 코브라가 있다. 애굽은 사단의 힘으로 부강해진 나라였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 세상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노예와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단의 힘으로 부요한 자들이 가득 잡고 있는 것이다. 그 곳에서 성도들은 겨우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주 께 부르짖는 삶인가, 세상을 즐기고 있는 삶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성실함 만으로는 살 수 없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단에게 송두리째 주어서 악을 행하는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악의 힘으로 부요한 자가 온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이 힘들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성실함 만으로 안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삶이 되어야만 살 수 있다. 애굽에서 부르짖을 때 주님이 건져내시는데, 주님이 창조하시는 이유를 회복한다.『내 백성으로 나를 예배하게 하라』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어졌는데, 사단과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처럼 예배를 받으려는 자리에 안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범죄한 천사들을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고, 그들에게 맡긴 예배하는 일을 인간에게 맡긴 것이다.『육체를 가진 너희가 해 보라고』
삶의 현장에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는 사람들이 주일이라고정한 날만 하는 것이 아니라『주는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항상 삶의 현장에서 단을 쌓는 예배가 있어야 한다. 야곱은 도망가다가 어느 장소에서 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된다. 야곱의 영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돌베개를 세워서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다. 삶의 현장이 돌기둥을 세우는 성소가 되어야 한다.
예배는 승리다. 도망자의 삶을 사는 야곱인데도 그 곳이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는 것이다. 일터와 가정에서 전심으로 예배하므로 그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내 백성으로 예배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놀랍게 바로왕이 말한다.『그냥 애굽에서 예배하라』라고 했다. 주님이『안된다』고 하셨다.『삼일 길을 가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다. 삼일 길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세상에 대해서 단절되어 죽은 가장 귀한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예배를 드린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시간이든 세상과 단절된 시간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다.
애굽으로 부터 삼일 길을 떠나라고 주님이 명하셨다. 주님은 예배를 위해 기적을 주시고, 히브리 백성을 괴롭히던 애굽의 신들을 심판했다. 우리가 예배에 집중할 때 우리를 괴롭하게 만드는 사단의 세력을 주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예배를 막는 상황 속에서는 반드시 사단이 역사하고 있다. 그러나 전심으로 부르짖을 때 사단이 막는 환경을 주님이 해결케 해 주실 것이다. 환경이 어려워서 예배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안하기 때문에 환경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광야에서 너를 낮추시고』 바로왕의 노예로 사는 것처럼, 세상 일때문에 낮아지는 것으로 받으시는 주님이 아니다. 주님은 예배로 우리를 낮추신다. 예배는 세상일 때문에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높혀주기 위해 우리가 낮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의 삶이다. 예배는 주님을 높이고 우리를 낮추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일 때문에 낮아지지 아니하고, 주님으로 인해 낮아지는 예배의 자리로 가야한다. 그러면 주님이 시험하신다. 낮추시고 시험하사 너희 마음이 어떠한지를 주님은 알기 원하신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핑계대지 아니하고 순종하는지 주님은 알기 원하신다. 그래서 예배로 부터 순종이 나온다. 세상 일로 인해서 상처를 받더라도 주님께 순종하는 예배가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시험은 아무나 하시는 것이 아니다. 시험은 준비된 자에게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마귀의 시험처럼 넘어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하는 시험이다. 오직 예배로 주님을 높이고 우리가 낮아질 때 주님이 시험하시는 것이다. 그 시험은 오직 주님께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시험이다.
시험이 지나고 나면, 신명기 8장 16절에서『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시험의 끝은 복이라는 말이다. 시험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다. 그래서 감사해야만 한다. 예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신명기 8장 3절에서『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세례받고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셨다. 성경은 마귀를 『시험하는 자』라고 표현했다.『배가 고픈데 너는 능력이 있지 않느냐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예수님은 떡이 필요한데, 떡을 만들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이 때 시험은 하지 않는 것이다. 떡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금식이었다. 육신이 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을 인용하신다. 『기록된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하나님께서 금식을 명하셨으니까 금식을 순종하므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시험에 통과하여 순종하므로서 축복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명기 8장 16절의『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하심이라』마침내 라는 말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마침내는『너의 끝에』라는 말이다. 시험받을 때 우리의 끝에 온다. 시험받을 때는 내 지혜 내 능력, 내 인내에 한계가 온다. 더 이상 길이 없음을 본다. 그런데 시험을 통과하는 자는 거기서 육적인 우리가 죽는 것이다.『In your end』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시점에서 화가 나고 성질이 나는 것이다. 시험의 끝에 자아가 죽지 않으면 순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마침내』라는 말이다. 주님의 시험에서 우리의 끝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럴 때 복이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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