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죄를 사함받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2절『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오늘날은 이해되고 검증되는 것 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시대다. 그런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영을 흙 속에 넣어서 사람이 되게 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결과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면 죽은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일어난 것처럼 죽은 영이 부활하여 살아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될 뿐이다. 사람들이 예수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될 때 구원받는 것이다. 베드로는 삼년 동안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랐다. 물고기를 잡을 때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므로 그물이 찟어질 만큼 잡혔다. 장모의 열병도 즉시 나았다. 시작부터 기적을 체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예수님으로 부터 배웠다. 예수님이 물었다.『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믿었다. 삼년 동안 베드로는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이 땅에 내려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까지 들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물 위를 걸었던 자였다. 베드로의 경험은 자신의 이성을 뛰어넘는 영적 능력을 체험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베드로가 체험한 모든 것이 구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날 전도를 할 때『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아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될 때만 구원받는다. 그래서 구약시대가 끝나는 시기가 예수님이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까지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도 구약성경을 따라서 말씀하셨다.『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모세오경에 나오는 대로 따라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찟어졌다. 다시는 구약의 제사를 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구약의 그림자가 실체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에 삼년 동안 따랐던 베드로에게『사탄이 너의 믿음이 떨어지도록 밀까부르듯 하였다. 나는 너를 위하여 기도했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신앙이 누구에게 달려있는 것인가? 자기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사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행하실 일에 달려있다. 구원은 인간의 어떠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베드로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온갖 기적을 체험했지만, 돌이키지 않으면 주님의 형제들에 대한 사역을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돌이킨 후에』라고 하니 베드로가『주님 돌이키라니요? 뭐가 잘못한 것이 있나요?』베드로가 말하기를『저는 주와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음도 각오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은 아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생활이 아니라 존재를 말한다. 오늘날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과 교회생활을 착실히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돌이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나는 예수님 때문에 감옥에도 갈 수 있으며, 죽을 것도 각오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것이 믿음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대단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이『이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감옥에도 갈 각오를 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너는 오늘 밤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그런데 베드로의 태도가 오늘날 우리 자신과 닮아있다. 예수님은『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고 하셨다. 기도응답 받고, 성령 체험하고, 예언기도를 해도, 이것 자체가 거듭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인 모든 것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교인이면 모두 믿는다. 그것이 믿어지면 위급한 상황이 나에게 다가와도 절대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모순을 발견한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믿지만, 생활의 어떤 상황 때문에 염려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대단한 모순이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상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모순이다. 성경은 거의 보지 않으면서 뉴스와 연속극은 꼬박 꼬박 다 보는 것 이것도 모순이지 않는가? 이 모순은 베드로의 모순과 같은 것이다.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 모순이 나에게 나타나고 있다면 거듭남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거듭남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모두가 성도라고 자처하지만 율법 아래 매여있는 것이다.
이것을 주님이 베드로를 사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객관적 진리를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자기를 더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더 믿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증거이다. 회개는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죄를 사함받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 회개다. 예수님이 잔치에 대해서 예화를 드셨는데, 잔치는 꺼리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굳이 안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임금이 잔치를 준비해도 아무도 안 왔다는 말이다. 다 일치하여 사양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밭을 샀기 때문에, 소를 다섯 겨리(20마리 정도)를 샀기 때문에 라고 자기에게 타당한듯 말한다. 구원은 이 땅에서가 먼저가 아니다. 즉 내가 이 땅에 주인이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다. 롯의 처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었다. 그리고 삶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빠지지 않았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환락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롯의 처와 롯의 두 딸을 양쪽 팔에 껴서 천사들로 하여금 나오도록 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우기 전에『너희 가족이 소알성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소돔성을 심판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롯의 처는 구원받지 못했다.『이제부터 뒤돌아 보지 말고 머무르지 말고 계속가라』이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구원의 확신은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뒤돌아 보지 말고, 머무르지 말고, 계속 가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유다서 1장 3절에서『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만약 롯의 처를 만난다면 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롯의 아내여 구원은 언제나 똑같아, 너의 시대나 나의 시대나 아브라함에게나 구원은 같아』유다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기 때문에 편지를 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단번에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회개하여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이 좋아할만한 말만 골라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장 5절에서『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우리는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지만 오늘날 롯의 처를 다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두들 애굽으로 부터 나왔을 것이다. 세상으로 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주님은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빠지 않고 소돔과 고모라로 부터 나왔는가? 나왔어도 믿지 않으면 멸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잘 안한다. 『여러분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나왔습니다. 구원을 확신하십시요 구원을 받은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요』그러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합니다』롯의 처는 못했다. 힘써 싸우지 못했다. 놀랍게 그녀는 뒤돌아보고 말았다. 광야에서 히브리 백성이 애굽을 나왔는데,『이 맛나를 먹는 삶보다 차라리 애굽이 나았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몸은 애굽을 나왔는데, 그들의 마음 속에 애굽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롯의 처와 같은 상황이었다. 하나님이 멸망시켜 버린다.
우리의 예배가 에덴동산의 숲이 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였다고 말을 하면서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회개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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