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사도행전 26장 17-21절『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사도행전이 거의 마치기 전에 아그립바 왕에게 다메섹에서 들은 음성을 간증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한 사정을 말하고 있다.
회개없는 믿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믿는 믿음에 불과하다. 사도바울이 들은 음성이『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이 말씀의 전제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사단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왕의 백성이었던 히브리 백성이 자기네 힘으로 애굽을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들이 부르짖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 주셨다.
영접기도는 가짜다.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다. 세상의 노예인 것이다. 세상으로 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다. 히브리인들의 육신은 바로왕의 진노 아래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유월절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바로왕의 진노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단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알게 된 것이 하나님의 진노였다.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놓이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사단의 권세로 부터 놓이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는다. 사단의 권세로 부터 놓이는 것은 구속(속량)이라고 한다. 그러나 속량과 회개는 붙어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성처럼 붙어 있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 문제는 십자가에서 주님이 혼인잔치의 맛있는 짐승처럼 잡혀 죽었다. 주님은 자신의 잔치를 위하여 친히 2000여년 전에 제물로 오셨다. 이 번에는 제물로 오시지 않으신다. 이번에는 제사장으로 오신다. 양과 염소를 가르실 것이다. 모든 땅 다메섹, 유대땅, 예루살렘, 이방인에게 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키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 회개를 외쳐야만 하는 것이다.
회개하고 돌이켜져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 이것만이 살길이다. 아그립바 왕에게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이 들은 음성이『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그 다음에 죄사함이 나온다. 죄사함은 예수의 피만이 적용된다. 예수의 피로만 우리의 죄가 씻어진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피로 씻는다고 해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살아나야지만 죄가 예수의 피로 씻어지는 것이다. 영이 살아나야지 하나님이 이렇게 죄를 씻어주신다는 말이다. 내가 죄를 고백한다고 죄가 피로 씻어지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탕자의 비유는 세번째 비유인데, 앞에 두 비유가 있다.  첫번째, 잃은 양이 돌아오는 것, 그리고 두번째, 드라크마를 등불을 켜서 찾는 것, 첫번째는 목자를 버려 잃어버린 양이 된 것이다. 목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자기의 행동을 회개하는 것이다. 이게 양의 허물이다. 양이 지은 죄다. 두번째 비유는 동전이 죽어있는 것이다. 영접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죄다. 앞의 두 비유는 인간의 영적인 것이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탕자의 비유는 회개라는 말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기를『죽었다가 살아났으며』라고 했다. 탕자의 비유는 거듭남의 비유인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다. 바로왕의 노예가 스스로 나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부르짖는 것 뿐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은 부르짖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 중세 때 면죄부보다 더 많은 미혹을 하는 것이 바로 회개없이 하는 영접기도라는 사실이다. 모든 죄를 버리고 합당한 열매를 맺고, 그럴 때 주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죄사함을 얻게된다. 죄 사함 다음에 나오는 말이『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바울에게 직접 말한 것은『사단의 권세로 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고, 그 다음에 죄사함과 그리고 나를 믿어 거룩히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라고 말했는데, 아그립바 왕에게 이것을 들었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히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있게 하신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는『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이 문장은 네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개(능동), 세례받는 것(수동), 죄사함을 받는 것(수동), 성령의 선물(수동)이다.
세례받는 것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3-6절에서『세례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장사되었으며,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세례는 회개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후에 죄사함을 얻는 것이다. 얻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위하여 세례를 받으라는 말이다. 세례를 받아야지만 죄사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죄사함을 받아 깨끗해진 것으로 믿고, 증표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세례를 죄사함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죄사함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말하기를『예수님이 당신을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의 피로만 씻어집니다』그러면 구원받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죄 용서만 받으면 구원받는 줄 믿는다. 절반이 부족하다.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는 것 만이 구원의 길이다. 회개할 때 예수님과 함께 죽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유다서 1장 3절에서 말하는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다. 그 속에 기업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적용된다. 이것이 디도서 1장 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나안을 들어가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병 고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 온 믿음과는 다르다. 구원받으려 나온 믿음이다. 구원의 조건은 회개와 믿음이다. 그 믿음은 예수와 함께 죽는 믿음이다. 창세기에서 두루도는 불 칼을 맞고 육적인 것이 죽어 생명나무로 들어가는 믿음이다.『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육적인 마음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앞으로 부터 이를 것이요』회개해야 새롭게 되고, 새롭게 되는 날,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다. 그리고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얻는 것이다. 그런 후에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향한 거룩한 성도에게 기업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기업이 있는 것이다. 가나안을 얻는 것이 기업이다. 이 땅에서의 기업은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기업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려 오신 이유는 이 땅에서의 승리를 위함이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회개없는 사람들은 교회가 될 수 없다. 다만 회개없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센타일 뿐이다. 내가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될 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