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않는 자들


요한계시록 21장 8절『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주님은 천국과 지옥을 만드실 만큼 의로운신 분이시다. 왜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시는가? 의롭기 때문이다. 새하늘과 새땅에 거하는 자는 의에 거하는 바, 그래서 성경은『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주의 나라와 사랑을 구하고 있다. 탕자의 비유에서 말하는 것은 사랑의 아버지이지만 아들은 사랑의 아버지를 버릴 만큼 탕자라는 말이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인간이 돌이켜지는 것이 아니라 의의 하나님이 계시될 때 인간이 사단에게 속았던 것을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지옥에 보내는 첫번째의 그룹은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두려워하는 자들을 주님은 위로하지 않으신다. 잠언에 사람을『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걸리거니와』라고 했다. 속박에 걸린다는 말이다. 사람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편강도가 좌편강도에게『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라고 한 말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으로 간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 때 제자들이 두려워 떨었다. 예수님이 그 배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도 두려워서 떨었던 것이다. 우리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도 주님은 주무실 수 있다. 주님이 찾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의 사람이다. 제자들은 풍랑에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지만, 이것은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배가 가라앉고 가라앉지 않고는 주님의 손에 달려있다. 즉 죽고 사는 것은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를 깨울 때까지 주무시는는 것이다.
인생의 배에 풍랑이 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인생의 배가 가라앉지 않게 노력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주님을 깨우는 사람인가? 구원받는 믿음은 증명될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멈출 때까지 주무신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를 깨울 때까지 기다리신다. 믿음은 상황에 반응하지 않고 주님께만 반응한다. 이 땅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구원받는 믿음은 능히 주님을 신뢰하게 한다.
두려워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상황을 두려워한다는 말이다. 그 두려움 속에는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다.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풍랑으로 부터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는 자는 주님께만 반응하는 자들이다. 상황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 14-15절에서『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악한 영을 불어넣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는 것이다. 우상에게 절을 하던 안 하던 모든 것은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사람을 두려워 함이 우상에게 절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 14장 9-12절에서『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구원받는 믿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염려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 만 바라보고,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이 풍랑 위에 계시면 배를 나와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로 가야만 한다. 주님이 배 안에서 주무시면 주님을 깨우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이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주님이 배 안에 계셔 풍랑이 칠 때도, 인간의 육신은 상황에 반응하게 된다. 풍랑에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하지, 주님을 깨우지 못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이것이 구원받는 회개한 자의 믿음이다. 회개와 믿음, 믿음과 거듭남, 칭의와 성화 이런 말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왜 분리된 것 처럼 말을 하는가? 바로 구원받는 믿음에서 벗어난 자들이 바라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믿음이나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나 같은 뜻이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구원받는다. 주님이 계시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회개해야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다니엘 시대나 에스더처럼 상황이 더 어렵게 되더라도 주님께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어려움이 왔을 때『이것이 하나님께 어려울까?』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함께 있을 수 없다. 구원과 염려는 함께 있을 수 없다. 구원에 대한 믿음이 들어오면 염려는 나가게 되어 있다.『염려가운데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빛이 들어오면 염려의 어두움이 나가는 것이다.
주님이 함께하면 어느 곳이나 천국이 되지만, 주님이 없으면 지옥이 되는 것이다.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만을 붙잡는 자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10장 29절『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어떤 것에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된다. 주님 만을 온전히 순종하면 된다. 31절에서『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두려워하는 자는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를 지옥으로 가게 한다.
구원받는 믿음은 어려움이 올 때 증명될 수 있다. 어려움이 올 때 주님을 믿고 순종만 하면 우리의 역할은 끝이다. 주님이 이삭과 이스마엘과 같은 사람을 나누실 것이다. 이스마엘처럼 육신을 따라 난 자는 순종이 불가능하다. 이삭과 같이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아버지가 제물로 바치려고 하던 상관 안하는 것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열심을 내어서 주님을 두려워하고 회개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세상에서 떨어질까 염려한다면 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사람을 두려워하므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지 못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것이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였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보니 두려워했다는 말이 나온다.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고 잡지 않으면 어느 순간 두려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4-36절에서『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복음이 선포되면 이런 일은 피할 수 없다. 집안에서 부터 엄청난 핍박이 올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서 두려움으로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므로 자기 식구를 못이기는 것이다. 39절에서『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이것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자의 모습이다. 구원받는 자는 상황이 어렵게 될지라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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