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속이지 말라

갈라디아서 6장 7-8절『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교회 사람들은 처음에는 십자가에 주목하다가 시간이 흐름으로서 율법에 주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것이다.
이것이 뒤바뀌는 시점이 바로 열심을 내어서 스스로 잘 믿는다고 생각될 때이다. 스스로 쌓아둔 것을 주님이 거두어 가신다. 성령을 따라 사는 자와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빛과 어두움처럼 분명하게 드러난다.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사사로운 지혜를 사용한다. 하늘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4장 22-23절에서『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약속으로 난 자를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라고 했다.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롯(육정)과 함께 하다가 모든 것을 빼앗긴다. 그 다음은 다메섹의 고향 사람 엘리에셀을 말했는데, 하나님은『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계집종으로 부터 이스마엘을 낳는다. 창세기 16장 2절에서『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데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이 사건이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떠난지 10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10년 동안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만나고, 전쟁도 이기는 체험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이다. 아브람이 75세에 하람을 떠나서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다. 아브람의 몸이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13년간 주님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런데 17장 1절에서『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그리고 17장 2절에서『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언약을 세운 것이다. 17장 7절에서『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이 영원한 언약이 10절에서 말하는 할례다.
주님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 전에 15장 6-7절에서『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라』주님이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낼 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작정하셨다. 여기서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다. 그런데 이 믿음을 바울이 로마서에서는 인용하지 않았다. 로마서에서는 100세가 되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는 이스마엘을 낳기 전에 이미 아브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다. 이상한 것은 아브람을 이미 의로 여기셨는데, 왜 100세가 되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한 것인가?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주신 의를 잊어버릴 수가 있다는 말이다. 천로역정에서는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천로역정이 갈라디아서다. 그래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삼년된 암 염소와 암소를 쪼개라고 하셨다. 15장 10절에서『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하니하였으며』여기『쪼갠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언약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짐승을 죽여서 쪼개는 것이 언약이다. 모든 언약은 죽음을 기초로 하는 것이다. 그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는 것을 아브라함은 보았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내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이 놀라운 경험을 했으면서도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거듭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육정으로는 절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라고 말할 때, 나에게 쓰나미처럼 물결이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는가? 이 말씀을 선포하려 할 때, 율법이 그 사람을 사로 잡는다.『네 현재의 삶이 이런데 무슨 거듭났다고 하는가?』이게 미혹이다. 율법적 사고에 사로 잡혀있는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기 전에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육신이 율법에 매여있기 때문이다. 사단이 바로 이것을 노린다.『구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죽는 것은 육적인 자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사단은 믿는 사람을 율법적 생각 속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육적 죽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을 추구하게 만든다.
내 뜻, 내 생각, 나의 지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앞에 내려 놓아야 하는데, 육적인 자아는 절대 내려놓지 않는다. 주님은 아브라함이 육적으로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100세가 된 것이다. 창세기 17장에서 할례가 나온다. 할례는 살을 베어버리는 것이다. 할례는 언약의 씨를 포함하는 뜻도 있지만, 아브라함의 육체를 베어버리는 것을 상징한다. 즉 육적인 것이 죽을 때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이다. 이제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되었다. 창세기 17장 17절에서『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이때까지도 아브라함은 영원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사람들도 환란이 오면 자기 육체를 살기 위해 배도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리요? 육적인 것이 죽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삼년 동안 주님과 함께 한 베드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힐 때 도망갔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죽은 자가 살아나도 육적인 그들은 회개치 아니하리라』고 한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 죽은 나사로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지만,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가버렸다.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앞에서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자만 회개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대속하는 것을 믿지만, 나의 존재와는 별개가 되어가고 있다. 십자가는 내가 죽어야 할 곳이 아니라, 나의 보호막이 되어 있는 것이다. 십자가가 나의 보호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육이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어리섞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다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섞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는가』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거한다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자기의 육적인 것이 죽지 않는 한, 육체의 생각을 따른다. 어느 날 믿음을 통해서 주님이 의롭다 하심을 줄지 모르지만, 육적인 것이 십자가에 섰을 때, 결국 자기가 스스로 그 믿음을 버리는 것이다.『내가 스스로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육적인 자아가 죽을 수 있는가』라고 회의적으로 반문하면서 믿음을 버린다. 결국 자기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이『내가 100세가 되는데, 어떻게 자녀를 생산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 것과 같이 자기의 존재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후 아브라함이 죽은 자 같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으신다. 우리도 비록 살아있으나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 같이 되어야만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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