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보다 더 귀한 시련
베드로전서 1장 23-25절『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성경 말씀이 왜곡되지 않고, 영원히 변치않는 말씀이 심겨질 때 사람들을 거듭나고 변하게 된다. 이 땅에서는 무엇인가 소유하고, 이루는 것이 기록되거나 남게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런 것이 하나도 기록되거나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마태복음 5장 3절에서『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영이 비워져야 천국이 임한다. 사람들의 영에 세상의 기준으로, 세상의 것으로 가득차 있다. 아무리 오래살고, 아무리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 나라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든든하게 여기는 것들은 죽음이 눈 앞에 올 때 주님의 나라에는 하나도 계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식을 많이 쌓은 것, 재물을 많이 모은 것들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성도들은 죽을 때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분명해진다. 지옥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것 외에는 사실 이 세상에서 열매라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잃어버린 영혼은 구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다가 이 세상을 끝내면 주님이 무엇이라 말하실까? 우리의 시각을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옮겨야 한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하고 선명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빛에 있으면 천국이요, 어두움에 있으면 지옥이다. 하나님 나라에 마음이 있으면 천국, 세상에 마음이 있으면 지옥이다. 이같이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중간 지대에 머물려고 한다. 그러나 중간지대는 없다. 천국 아니면 지옥이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의 길로 가는 것, 또는 그 길로 가는지 확인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이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망한다.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육신적인 것을 든든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절망이 오거나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주님만을 찾게 된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것이 든든해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육신을 든든히 여길 때는 하나님이 깨달음의 기회를 주지만 전심으로 주를 찾지 않는다. 찾기는 찾지만 전심이 아니라 대강 찾는다.
주기적으로 사람들은 건강검진을 하는데, 건강의 기준으로 부터 벗어나면 열심히 고쳐나간다. 그런데 성경에 구원의 기준이 나와있는데, 그 기준으로 부터 벗어나 있다면 고쳐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다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천국간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기준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누가 왜곡시키고 있는가? 성경의 기준에 따라『천국 갈 사람이 얼마 없다』고 말한다면, 『왜 이 따위 말을 함부러 하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요, 마음을 돌이켜서 진심으로 회개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답을 성경을 통해서 반드시 확인해야만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을 얼마나 많이 왜곡시켜 말들을 하고 있는지, 교회 사람들은 스스로 성경을 읽고 확인하지 않으면, 장님이 장님을 따라 지옥 구덩이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이 암에 걸리면 물론 병원에서 수술을 하지만, 암을 이기기 위하여, 책을 사서 보기도 하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마찬가지로 죄로 부터 벗어나려면 성경을 잘 읽어야 한다. 죄로부터 벗어났는가?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인가? 성경 속에 분명히 답이 있다. 직접 찾아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에덴동산의 숲이 될 수 있다. 범죄한 인간이 숲에 숨어있다고 괜찮은 것이 아니라 결국 에덴동산으로 부터 쫒겨난다. 예배 속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자녀가 유괴당했다고 생각한다면 집에 머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려고 눈이 뒤집힐 것이다.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눈이 뒤집혀야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마귀때문이다. 마귀를 이기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마귀로 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다. 마귀로 부터 건짐을 받은 자라면 잃어버린 영혼을 마귀로 부터 건져내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 땅에서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핍박과 시련을 이기면 바로『이것이 천국으로 가는 믿음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기뻐할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서『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믿음에는 분명 시련이 있다. 그런데 그 시련이 금보다 귀하다고 했다. 따라서 값싼 구원은 없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버리셔야만 했다. 누가 구원을 값싼 것처럼 생각하는가?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선하지 않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타락한 존재라는 말이다. 그래서『같이 죽자』는 말이다. 하나님은 아들로 하여금 죽게 하셨는데, 하나님과 언약을 하겠다는 자들이『죽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죽겠다고 하고서는 말로만 죽는다. 육적 자아의 죽음은 엄청난 대가가 필요하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회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녀였다. 그러나 이삭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약속의 자녀이고, 이스마엘은 혈통으로 난 자녀다. 이스마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셨는데,『그가 기도하면 다 응답해 주겠다』는 뜻이다. 이스마엘이 기도하면 응답이 되었다. 물이 없을 때 기도하면 우물을 발견한다. 그리고 번창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열두 방백을 낳게 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자는 단 하나 우리 안에 없는 생명이 들어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야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이다. 아브라함이 자녀를 낳을 수 없는 99세가 되어서,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생명, 이삭이 바로 거듭남이다. 이것은 육신이 얻는 생명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 얻는 생명이다. 헌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에 물을 담는 것이다. 이 생명을 얻으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싶은 온갖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헌 부대를 버려야만 한다. 천국의 것을 얻었다면 이 땅의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는가?
전도서 1장 2절에서『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솔로몬은 권력, 명예, 부를 모두 향유했던 왕이였다. 전도서 1장은『천국에서는 이런 세상의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1장 7절에서『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인간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 존재라는 말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만 고난 속에서도, 핍박 속에서도 감사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에 붙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모습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 구원을 위하여 몇시간 동안의 극한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