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시고

사도행전 17장 30-31절『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 하니라』마귀는 광명한 천사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가장한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기록된 말씀 외에는 없다. 사도바울이 철학자들이 모이는 아테네에서 설교하였는데, 설교의 마지막 부분의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앞 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는데,『창조하신 일 가운데 누구나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에게『회개하라』고 했다.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의 시작은 회개다. 예수를 믿지 않다가 믿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설교되고 있는 내용들 중 상당 부분이 구원할 수 없는 플라시보(위약)다. 주님이 구원받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느니라』회개해야 주님이 믿음을 주신다.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기를『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즉 택하신 자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교회에서는『부르심을 받으면 다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택하심을 받는 사람은 적다. 구원의 믿음은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의 믿음은 거듭난 자의 믿음이다. 교회 처음 나와서 『오늘부터 예수믿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받는 믿음이다. 변화받는 믿음은 부모로 부터 받은 그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 다른 생명이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생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천국을 갈 수 없다. 한 생명에서 어떤 노력으로 서서히 바뀌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 한 순간에 다른 생명으로 치환되는 그런 생명이다. 그런데도『여러분, 변화하셔야 구원받습니다』라고 말들을 한다. 변화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인가? 자기가 변화의 주체가 되면,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99%를 변화시켜 주시지만 예수를 믿는 자기도 조금은 노력해야만 된다는 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변화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변화받기 위한 육적 자아의 죽음 외에는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믿음이 오기 전에는 모두가 다 율법 아래 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어떤 조건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다.『좋아하는 것을 꾾어야 하는데, 이 시간에는 성경 공부를 해야만 하는데』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조건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생명을 얻는 것이다. 모든 성경의 복음은 빛이다. 주님은 꽃을 만들기 전에 꽃에게 생명을 주는 태양을 먼저 만드셨다. 이 꽃은 태양으로 부터 빛을 받는다. 태양으으로 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은 8분 30초 후에 꽃에 도달한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태양과 꽃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꽃의 능력은 빛을 흡수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꽃과 태양이 하나가 된다. 2000여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는 꽃이 태양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서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되는 믿음은 초자연적인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 믿음은 꽃에게 태양 빛을 주는 것처럼 주님이 주셔야만 한다. 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에 대해서 사도행전 20장 21절에서 말한다.『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회개가 먼저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회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가? 교인들은 회개 설교를 싫어한다. 회개를 싫어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회개처럼 기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옆집에 경찰이 살면 마음의 평강이 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도둑이 사는 집의 옆에 경찰이 살면 불면증이 올지도 모른다. 회개를 설교하면 왜 싫어할까? 마귀는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회개보다 더 기쁜 것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사람들 대부분이 회개보다 성령을 더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성령 체험하는 집회가 가장 인기를 끈다. 그것 자체가 구원받지 못한 증거다. 성령 체험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예수님은『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할찌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능력을 행하며, 귀신을 쫒았나이다 라고 말할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내가 너를 모른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 믿으면 우리가 주님을 알게되지만, 회개하지 않고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주님이 모른다』라고 말하실 것이다. 구원은 철저하게 회개에 달려있다. 왜 계속 회개를 강조하고 있는가? 회개한 사람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것 처럼, 어린양을 따라간다. 어린양은 고난받고 죽으러 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가 마치 믿을 때의 초보 단계로 생각한다. 십자가는 처음이요 완성이다. 사람들이 성령을 추구할 때는 예수믿은 후, 지겨울 때 십자가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것이 마치 신앙이 좋아지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2장에서『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에 치중했던 교회다. 사도바울은 삼층천에도 가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외 수많은 은사를 가진 자였지만, 십자가만 구한 것이다. 구원은 회개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세번 부인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몰랐다. 예수님은 미리 아셨지만 베드로는 몰랐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베드로는 이 세상 모든 교회 사람들의 예표인 셈이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 믿는 베드로였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자 삼으신 후 삼년이 지나, 베드로에게『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오늘밤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모든 교회 사람들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마주 서기 전에는 우리가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없다. 베드로는 세번 부인한 후에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깨닫게 된 것이다. 베드로가 마음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것을 믿지만 그것은 부모로 부터 받은 육의 마음인 것이다. 육의 마음은 십자가 앞에 서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 마음은 죽어야 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을 받아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회개는 자신이 처한 존재의 상황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어제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내일 죄를 안짓는 것인가?세상죄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존재의 문제인 것이다. 죄를 회개해도 죄를 짓게 하는 존재가 부모로 부터 받은 육적인 것이면 그것은 회개가 아닌 것이다. 일시적으로 죄를 면피 받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의 피로 죄를 씻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있어야만 된다.

회개는 자신이 구원 받을 수 없는 육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와 마주 서서, 그 십자가가 『나』라는 육적 존재의 십자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아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하나님이 정하신 한 사람, 그 날에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했다. 정하신 한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이유는 『이 예수가 너희를 어느 날인가 공의로 심판하실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을 전도하려면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말보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긍정적인 말로 그들을 대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이것이 복음의 바른 길이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가 이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를 모르게 되고, 아예 회개가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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