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아래 있나 심판 아래 있나

로마서 3장 19절『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율법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가르치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랑의 주님을 믿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주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음성도 듣는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자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옛 생명이라고 한다. 옛 생명은 변화가 불가능하다. 이 말씀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는 말씀인데, 믿는 자들이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인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에는 의와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사랑을 먼저 강조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마라』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숨었을 때 하나님이『아담아 어디있느냐』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기록된 최초의 음성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도 없어지고 무화과 나무의 잎도 찟어졌다. 범인은 아담이다. 주님이『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했는데, 이것을 하나님 사랑의 음성으로 생각하는 자가 많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생각하는가?『어디』라는 단어는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재구성해보면『네가 어떻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느냐』로 해석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진노하시는 말씀이다.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죄를 고민하는 자에게『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서 말하는『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이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부터 마귀는『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인간들의 마음에 심어주었다. 많은 교회에서 전도할 때도『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한다. 미혹이다. 그러나『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노하십니다』라고 해야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는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가 만든 성막에서만 나타나신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막에 제물을 가지고 와야한다. 그 분이 구원자이시다. 구원자는 아무 곳이나 계시지 않는다. 세상 어느 곳을 다녀도 만날 수 없다. 구원자는 회개하고 거듭난 자, 거룩하게 구별된 자만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하나님은 악인의 밭과 의인의 밭에 햇빛을 주신다』고 했다. 창조주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모든 자에게 진노하신다. 이것이 노아가 들은 말씀이다. 노아에게 주님이『120년 뒤 내가 물로 다 심판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이시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지만 히브리어로 복음이라는 단어는 그냥 뉴스다. 노아 때 꼭 알아야 되는 뉴스는『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그들의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전하시는 것이다. 노아의 친척들과 자녀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 예배했을 것이지만 오직 노아만 당대 의인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지만, 의인으로 구원받을 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예배하는 것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인이라 칭해주셔야 의인이 되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이 동행해 주셨다.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의인이 되는 것이다. 노아가 120년 동안 부르짖었는데, 반응한 자는 노아의 부인, 세명의 아들과 며느리 7명 뿐이었다. 노아의 형제들, 다른 아들들, 손자, 조카 등 많은 친척들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아가 외친120년이 지나고, 5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다. 방주 크기가 결정되고 노아와 가족 7명 외에는 짐승들만 태울 수 있는 방주의 크기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물로 심판한다는 복음을 120년 동안 외쳐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방주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례다. 세례는 온 땅에 물로 심판하는 그 물을 가리킨다. 우리가 세례받는 것을 믿음의 세례라고 하지 않고 회개의 세례라고 한다. 회개의 세례는 우리가 노아 때 살았더라면 우리는『노아의 말을 듣지 않을 자』라는 말이다.『주님 나는 방주 안에 있을 자가 아닙니다. 내가 그 때 살았더라면 방주 밖에 있을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회개다. 세례요한이 전파한 것이 바로 회개의 세례를 죄인들에게 전파한 것이다. 세례받을 때『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방주에 들어갑니다』라고 하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나는 방주 밖에서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라고 하면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앞의 것은 믿음의 세례라고 하지만, 뒤의 것은 회개의 세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은 어떤 세례를 받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도 세례받을 때 회개한다고 말은 한다. 내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었고, 세상 죄를 지은 죄를 자백하며 세례를 받으면서 죄를 물로 씻는다. 그러나 세례는 물로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내 삶을 주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하는 세례다. 어떻게 주께 드리는가? 각자의 삶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세례는 개인이 자격증처럼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주체가 죽는 것이다. 육적인 것은 슬픈 일이지만 영적으로는 기쁨이 오는 세례다.
이론적으로 주님께 맡기는 것이 세례지만, 현실적으로는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사는 자가 극히 드물다. 이것은 대단한 모순이다. 이 모순은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그래서 모르고 있거나, 알았어도 주께 맡길 수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맡길 수 없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은 육이 살아있다는 증거다. 내 삶의 주인은 바로『나』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단지 천국을 가기 위해 세례를 받은 것이지, 나의 옛 사람 모습 그대로가 좋은 것이다. 나의 본래 모습을 지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교회에서『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옛모습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천국가는 것은 주께 맡기지만, 이 땅에서의 삶은 주께 맡길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순종이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칭찬받는 삶을 살지라도, 주님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한다면 무슨 덕이 있겠는가?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모른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오늘날 수많은 설교 속에서 듣고 만나는 예수는 가짜 예수일 수 있다. 예수님은 먼저『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례요한은 말하기를『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노아가 말한 말과 동일하다. 회개없는 믿음은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회개는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자 만이 내려놓을 수 있다. 인간 속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는 인격체가 있다. 그가 사단이다. 그 사단을 따랐던 옛사람, 선악과를 먹기 위해 사단을 따랐던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옛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는 주님께 대한 순종의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복음은『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을 때 살 수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로 현혹하는 사단의 말을 분별해야만 한다.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회개를 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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