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니라
누가복음12장 31-34절『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예수님이 무리 수만 명이 모인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적은 무리는 제자를 말한다. 앞에서는『재물에 대한 염려와 탐심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주님은『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하셨고 오직 주의 나라를 추구하라』고 하셨다. 모든 상황에서『주의 나라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주님의 나라는『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그들 중에 있다』고 했다. 기도 많이 하는 곳, 성경 많이 보는 곳, 찬양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두 세명이 모인 곳에 있다는 말이다. 믿는 자의 연합 속에 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소유를 팔아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고 하셨다. 두 세명이 모인 곳에는 이 땅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이 땅의 것을 팔아서 하늘의 것을 얻는 곳이다. 두 세명이 이상 모인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곤란하다. 두세명이 모이면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오늘날 현실은 어떠한가?
주님은 적은 무리에게『하나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무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있을 수 없다. 그 분을 쫒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을 쫒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주기도문에 있는 내용들이다.
주의 나라는 두 세명이 시작해서 확산해 나간다.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세명이 예배하고, 삶을 나누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말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예배하고, 삶을 나눌 수 있는 곳은 서로 허물을 나눌 수 있고, 그 곳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런 삶을 나눌 수 없고, 그저 좋은 소리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진다면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이다.
성경에서 천국은 보석으로 표현한다. 모든 보석의 특징은 그 물질이 변한 것이다. 원석이 아니라 다르게 변한 것들이다. 광물질이 불 속에서 변화되거나, 생물이 고난 속에서 영롱한 진주를 탄생시키는 것들로 되어있다. 내적으로는 모인 자들의 자아가 죽고, 성질이 불에 타서 변화될 때 그 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속성이 변화되는 것이다. 외적으로는 사람들의 재물을 나누어 가져도 아깝지 않은 곳,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다. 이 땅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주님이 이런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구약에서『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다. 교회가 믿는다고 하는 자의 이익을 얻는 곳이라고 한다면 그 곳은 썩은 웅덩이가 될 것이다. 그 곳은 주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 기쁜 곳이 되어야 한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그래야 감사가 나오게 되어있다. 어떤 상황이 와도 주께 경배드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는 주께 경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항상 감사하라 그리고 기도하라』고 했다. 기도는 호흡과 같다. 기도하기 전에 항상 기뻐하라는 말이 있다.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을 기뻐하라』는 말이다. 하박국서에 『무화과 잎이 마르고(봄 농사가 실패), 포도나무도 마르고(여름 농사도 실패) 감람나무의 소출도 없고(가을 농사 실패), 논밭에 식물이 없고, 외양간에 소와 양이 없지만(겨울 농사도 망한)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할 것이라』고 했다. 믿는 자의 인생이 어려워질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 고난 가운데서 보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찬양은 주님께 감사의 뜻으로 하지만, 경배는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경배드린 것은 다름아니라 아들을 바치는 것이였다.『내가 내 아들과 함께 경배하러 간다』고 말했다. 다윗과 밧사바 사이에 첫 아들이 죽게되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죽고 말았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왜냐하면 취하신 분도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께 경배드린 것이다.가장 유명한 말은 욥기에 등장한다. 욥은 모든 것을 잃게되지만『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다만 주를 경배할지라』라고 했다.
주님이 열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 한명만 주님께 돌아왔다고 말한다. 주님은『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는가?』 라고 하셨다. 이 이방인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인이라. 돌아오지 않은 9명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성공과 행복이 있다면 더욱 더 주님을 잘 믿을 것 같지만 솔로몬의 사례를 통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 권력, 부, 명예 모든 것을 주셨고, 그는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의 은혜까지 입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솔로몬은『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릴까봐 그런 기도를 했다. 둘 다 죄를 짖지 않기 위해서 그런 기도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잃지 않는 것이 감사다. 감사는 축복 속에서 주님을 잃지 않는다. 바울은『감사함으로 기도에 깨어있으라』고 했다. 감사는 영적인 것이다. 여호사밧 왕 때 세 나라가 연합군으로 쳐들어 왔는데, 그래서『이 큰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기도했다. 우리가 살면서 주님을 따르다 보면 대처할 능력이 없고, 지혜가 없는 그런 경우가 생긴다. 그 때는 누가 주인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주인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주님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평생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사실 그 곳이 예배할 곳이고, 그 곳이 가나안의 입구다. 피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히브리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왕의 압제로 부터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주님이 모세로 하여금『내 백성으로 나를 예배하게 하라』라고 하신 것이다. 구원의 시작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와 같다. 주님을 예배하도록 하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절망 속에서 예배가 회복되어야만 한다. 예배가 회복될 때 주님이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그 곳은 바로 예배하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세상 이야기 하다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다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여호사밧에게 말씀하시기를 전쟁터에 나가는 자들 앞에 거룩한 예배자를 세우도록 하셨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깊히 묵상해야만 한다. 전심으로 예배드릴 때 주님의 나라가 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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