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장 21-23절『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라고 하면서 전하라』고 했다. 전하라고 하신 것은『용서』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면서 숨을 내쉬면서『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신약에서 헬라어로『숨을 내쉬면서』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담을 흙으로 만드시고,『그 코에 숨을 불어넣었다』와 같은 의미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급한 바람처럼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 처럼 성령을 받았는데,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요한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 마지막에 기록된 것인데, 요한복음에만 『숨을 내쉬며(헬라어)』가 나온다.
요한복음의 성령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과 역사함이 다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성령이 사람들 위에 임하시면 능력을 받는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한 성령이시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정도는 아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 말씀하시기를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하셨다. 이 두 도시에서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해셨지만, 단 한 명도 회개하지 않았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누가』에 의해서 기록되었는데,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능력이라고 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 1장 8절『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여기에서 말하는 권능은 능력을 말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한『능력』과 같은 것이다. 권능은『권세와 능력』을 합한 말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능력이다. 증인이 되기 위하여 능력(두나미스)이 부어지는 것이다.
두나미스에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이 나왔다. 그와 같은 폭발적인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은 역사가 다른 성령이시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을 때 사이에 전하신 말씀이다.『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그들 안으로 들어가는 성령이시다. 사도행전의 성령은 그들 위에 임하시는 성령이다. 순서가 『안으로 들어가고』그 다음『위에 임하신다.』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위에 임하는 성령을 추구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위에 임하는 성령은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이 아니시라 능력을 주시는 분이다. 사람들 안에 들어가는 성령이 내적 변화를 이루신다. 가끔 신유와 예언으로 쓰임받는 종들이 범죄하여 넘어지는 것은 내적 변화없이 위로부터 받은 능력만을 의지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용서라는 단어의 짝이 있다. 빚진 자, 감옥, 권세라는 단어다. 성령이 사람들 안에 거하실 때 내적 권세가 임한다. 그 권세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권세다.『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성령이 사람 안에 거하실 때 그 사람을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변화시키고, 남들이 자기에게 지은 죄도 용서하실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권세가 두 세 사람이 모일 때 하나님 나라의 주권으로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것을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보았다. 그러나 삼일 뒤 부활하신 모습은 40일 동안 택한 자들만 보이셨다. 로마서 10장 9절은『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부활을 믿으면 구원받는데, 부활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으셨다. 그 당시 예수님을 죽게했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셨으면 다 믿을 것인데, 왜 안 보여 주었는가? 만일 부활을 보았더라도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사실 확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오해하고 있다. 사건의 사실 확인을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
보여주지 않은 것은 믿음의 실체를 알게하기 위함이다. 믿음은 예수님이 숨을 내쉬듯 와야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본 것은 수백명 밖에 되지 않는다. 승천하신 예수를 보여준 것은 훨씬 적은 수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날이 유월절이었다. 날짜가 구약성경에 지정되어 있다. 음력 1월 14일 밤에 잡혀 15일에 죽었다. 성령은 그 때로 부터 50일 뒤인 오순절 날 임했다. 승천절은 휴거의 그림자다. 그래서 휴거의 날짜를 말하는 것은 다 가짜다. 예수님이 승천할 때는 몇사람 없었다. 승천은 계시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의 승천을 본 사람들은 계시를 받아서 감람산에 모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천국간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회개해야만 된다. 그래서 육적인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데,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나는 죄인입니다 죄를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육적으로 죽지는 않고 의인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마치 그 고백이 구원의 조건이 된 것처럼, 그 조건을 이루면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내적 변화 없이 조건만 완성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죄를 버리는 것이 회개다. 죄와 단절해야만 한다. 성경의 지식을 많이 알고 성경에 대해서 설명을 잘한다고 회개한 자가 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죄를 버릴 수 있습니까? 인간이 버릴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지』라고 말들을 한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누구의 말이 맞는가? 누구의 말을 따라 가겠는가? 구약성경에서도 세례요한도『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돌아오라』라고 했다. 인간의 힘으로 죄를 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했겠는가? 세례요한이 『회개하라』는 말은『인간이 버려야 하는 죄』를 버리라고 했다. 그런데『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가 죄를 버릴 수 있습니까?』말한다. 속으로는 죄를 버리기 싫은 것이다. 주님이『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에서『그대로 두면』이라는 말은『죄를 붙잡고 있으면』이라는 의미이다. 죄를 버려야만 살 수 있다. 죄를 버리는 것은 죄인됨을 버리는 것이다. 죄인됨을 버려야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성령은 사람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이시다. 구원의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죄인됨을 버려야만 한다. 죄인됨을 버리고 우리에게 지은 누군가의 죄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의 용서는 용서받는 자의 기쁨이 아니라 용서하는 자의 기쁨이다. 그 기쁨은 성령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만 달란트의 빚진 비유를 생각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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