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대한 순종


마태복음 7장 22-23절『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이 산상 수훈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셨다. 많은 권능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자들에게『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거라는 것이다.『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주님이 알지 못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4장 8-9절에서『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그 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했다.『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는데』라고 말했다.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간증을 듣으면서 하나님을 알게된다. 이것을 우리의 믿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신바 되는 것은 회개한 자를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주님이 회개하는 자를 아는 것이 구원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알아야만 구원받는다. 회개없는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할 때 생명책에 기록하신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믿는 믿음이 사람의 마음에 새겼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의 조건은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하면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다. 회개는 죄인됨이 예수와 더불어 죽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내가 주인임』을 없애야만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거듭남이요 변화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4절에서『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에서『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는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광야에 나왔는데, 하늘에서 새벽마다 맛나가 내려와서 먹었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신령한 음료는『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다.『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조상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을 따랐던 것이다. 광야에서는 주인이 바뀌지 않은 신자들을 가리킨다. 구원은 사람이 주를 따를 때 구원받는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따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10장 5절에서『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회개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멸망당한다.
내 권리를 포기하기 전에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정말 기분 나빠질 때 드러난다. 내가 기분 나빠질 때도 주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기뻐지면 이것이 회개한 자의 모습일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1-4절의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매일 매일 기적을 체험하는데도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이 말이 베드로의 이야기와 같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장모가 열병이 났다. 예수님이 즉시 낫게 해 주었다. 베드로는 그 날 이후 메일 메일 기적 아니면 말씀 속에 살았다. 풍랑 위를 걷고, 3년 동안 기적을 보면서 살았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기 전날 밤에 예수님이『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배신하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너희들이 가진 생명이 구원받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오늘밤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리라』이 생명은 도무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생명 자체가 나를 위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전심으로 열심히 믿으면 정말 기적이 일어난다. 이를 두고『주님은 살아계신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것이 구원이 아니라는데 있다. 구원은 믿는다고 하는 자의『내적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회개는 철저히 나를 위해 살다가『아 이래서 예수가 죽었구나, 이제는 예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기쁨이구나』라고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예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기쁘지가 않은 것이다. 베드로는『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풍랑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를 변화산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체험해도 내적 생명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이게 거듭남이다.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성은 전적타락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열심히 전도하고 결국 전도한 자의 모습대로 지옥 자식을 만드는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소망은 단 한가지다. 주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주를 믿으라』가 아니라『주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회개다. 돌아가야만 한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탕자의 비유에서 처럼『죽은 것 같이 되어서』돌아가야만 한다.
히브리서 3장 16절에서『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이들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홍해바다를 건넌 사람들이다. 주님이 왜 그들을 보고 격노했을까? 히브리서 3장 17절에서 말한다.『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내가 주인인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내일의 죄를 염려하는 자들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으면 죄인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았으면서 『스스로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거듭났지만『그래도 매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 속에 파묻힌다.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는 범죄를 생각하지 않는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즉『예수 안에 있는 지』아니면 『예수를 그냥 믿는자』인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 안』이라는 말은『예수와 함께 죽은 자』를 말한다.

거듭남의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히브리서 3장 18절에서『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주인인 이유는 땅의 문제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예수님이 주인인 삶이 시작되면 땅의 생각 아니라 하늘의 생각으로 둘러싸이게 된다.『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살 수 있는가』에서『어떻게 하면 주 예수를 위해 살 수 있는가』로 바뀌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미쳤다』고 생각하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만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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