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25절『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베드로가『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을 때『이것을 알게한 것은 너 스스로가 아니라 네 아버지께서 알게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음으로『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서 삼일 후에 살아날 것』을 말해주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죄인들의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죽음의 값을 지불하러 오신 것이다. 그렇게 말했더니 베드로가『그리마옵소서 절대 그 일이 당신에게 미쳐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나님 아버지가 베드로에게 계시를 알게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야기 했지만, 베드로는『그리마옵소서』라고 응답했던 것이다. 계시가 사람에게 임해도 계시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베드로는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육신적이다. 열심을 내는데, 육신의 힘으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없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닮으면 안된다. 이게『신복음주의』라는 가짜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구별되는 것이 거룩함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않게 변하고 있다. 성전과 성막은 세상의 것이 절대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육신적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 일에 더 익숙한 것이다.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교회들은 환란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불에 타버리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고 볼 수 없다. 마지막 시대에는 주님이 불에 타지 않는 교회를 주님의 터 위에 세우실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는 자로다』 라고 하셨다. 계시가 있다고 육신의 생각이 멈추어지지는 않는다. 베드로는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육신이 멈추어지는 것은 단 하나,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마음으로 사단에게 속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 뿐이다. 거의 매 순간 매 사건마다 주의해야만 하는 것은 자기 육신적 생각(혼)이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말아야만 한다. 예수님이『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신 후, 마태복음 16장 24-25절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사람들은 이 말씀이 구원과는 관계없는 말인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말씀은 구원받고 헌신하는 제자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인 줄로 생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에는 관심없으면서, 예수의 피로 모든 죄가 씻어진 예수의 공로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구원에서 멀어진 자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라야 구원받는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쫒아야만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먼저 제자를 삼으라고 했다. 제자를 삼을 때 비로소 세례를 줄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요한복음 4장 1절에서『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전도해서 바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어야 세례를 받는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쫒는 자가 제자다. 이게 제자되는 회개의 시작이다. 회개의 완성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요,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요, 거듭남이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를 따르지 않고 말로만 믿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오늘날에는 많은 교회 사람들은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믿으면서,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냥 이론적으로 믿고 현실 속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서『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이 죄사함이다. 속량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서『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예수의 피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사는 것이다.『속량』은 산다는 말이다. 속량은 씻고 용서한다는 말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고 산다는 말이다. 이게 주인이 바뀐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믿는 자를 사셔서 주인되시는 일이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죄사함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이 바뀌어야 죄사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예수의 피로 죄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믿는다. 여기에서『주인이 바뀌는 전제』를 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이 누구인지의 문제는 말하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면 죄 용서받는다고 하니까, 참 쉬워 보이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주인이 바뀌지 않는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속량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회개는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주인이 자기인 사람은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주인이 자기인 사람은 구원받은 적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바로 마귀다. 왜냐하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바로 오늘날 자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과 만날 때 자기의 뜻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가 바로 마귀다.
자기의 생각을 사단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죄를 짓게된다. 세례는 자아가 예수와 더불어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예수의 피가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와 더불어 죽는 이것이 없다면 죄사함이 없는 것이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회개하는 자를 주님이 산다. 주님이 회개하는 자를 사면 죄가 사해진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노예를 사서 집에 데리고 가, 노예를 씻어주는 것처럼, 속량을 해야 죄사함이 있게 된다. 주인이 바뀌어야만 된다. 주인이 바뀌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만 된다는 말이다.
『예수를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회개를 전제한다. 왜 회개를 강조하는가? 그 이유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회개의 올바른 뜻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repent)이다. 주님께 돌아가려면 세상을 사랑하는 자아가 죽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내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주님이 구약에서 율법을 주신 것은『인간은 그런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는 다『율법 아래 갇힌 자』라고 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모두 율법 속에 갇힌 자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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