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교회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귀절일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받아드리고 있는데, 니고데모는 왜 말씀을 받아드리지 못한 것일까?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그를 믿는 자마다』의『믿는 자』가 바로 니고데모에게 하신『믿는 자』다.
교회 대부분 사람들은『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주님은『어느 시대에 나를 믿는 자가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다 주를 찾는다고 하는데, 주님은 로마서 3장 11절에서『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하신다. 왜 서로 다른가? 교회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사람들 처럼 살지는 않으면서, 사도행전과 같은 그런 기적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제자들 처럼 되고 싶지만 예수님의 제자 처럼 살고는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 않고, 자신들의 기준을 중요하게 인식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받을 수 없었다.『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의미를 모르면 안된다. 창세기 15장에서 주님은 아브람에게『자녀를 준다』고 하므로 그것을 믿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그런데 17장에서 주님이『자녀를 준다』고 하니 아브람이 웃었다. 완전히 믿지 않았다. 아브람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자신의 판단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백세가 되었고 사라가 구십세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웃었다. 마찬가지로 교회 사람들이『예수를 믿는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부분『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인데, 나의 선함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자기가 믿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에『믿음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은혜와 믿음은 선물인데, 그 기준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변한 적이 없다. 예수님은『종말 때는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다』고 하셨다. 주님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말인데, 정말 그런 것인가? 주님이라고 말하는 자도 기준이 자기면서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님이 주인이 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죄를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는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대부분 죄를 짓게된다. 그러나 주님으로 부터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자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죄와 세상으로 부터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것들과 적당한 타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죄를 짓고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주님께 타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런 상황에 대해서 회개를 전파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진정한 회개가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사도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에는 흠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예수믿는 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는 크리스찬을 잡으러 가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또한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님은 이런 사울을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나타내셨다.『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그런 후에 사울은 눈이 멀어진 것이다. 삼일 동안 물과 음식도 먹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회개는 육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회개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이 세상의 성공과 번영, 건강 등 세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단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단은『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고 했다. 주님이 주시는 길을 포기하면 어쩌면 잘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님으로 인한 기쁨은 주님께 회개하는 기쁨이다. 탕자가 죽은 것 같이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가니까, 아버지가 잔치를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기뻐해야 천국인 것이다. 내가 기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뻐해야만 한다. 나는 죽은 자같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회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진노의 심판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 같다. 과연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가 예수님이 주인인 교회가 될 수 있는가? 많은 교회가 이권으로 분열되고, 돈과 권력을 탐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하실까? 오늘날 많은 교회는 세월호처럼 가라앉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그를 믿는 자마다 주를 위해서 살지 않으면 못견디는 그런 삶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못한 이유는 바로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이 말씀만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오늘날 예배도 내가 좋아서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은혜받았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좋아서 나오는 예배는 다르다. 예배자로서 은혜가 아니라 제자가 되어서 복음 전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 때『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이런 복음이 전해질 때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신 주님의 사랑이 전해질 것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이 믿는 자에게 들어오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주인인 삶,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니고데모가 주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저를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모든 인간들이 뱀에게 물린 자들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를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를 모른다고 주님이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진리는 인간 안에는 없다. 진리는 하나님께만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뱀에게 물렸기 때문이다. 칼빈이 『전적타락』이라고 표현했다. 이 회개가 없으면 거듭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생활 성실히하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전적타락보다 좀 나은 타락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이 괜찮은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거듭난 것이 아니라 선한 율법 가운데 신앙을 쌓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신앙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 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은헤가 아니라, 자기가 거룩에 다가 가려고 하는 신앙이 될지도 모른다. 의로운 생명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죽은 자같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회개의 기회를 기다리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 만이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알 것이다. 하나님을 안믿다가 믿게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지 않고, 예수믿는 가운데,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를 구원이라고 한다.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때 사도바울이 고백한 것 처럼『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앞에 선 자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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