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한 말씀
로마서 10장 9-10절『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말씀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서 광야에 나와서 40년 뒤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히브리 백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교회 처음 나온 사람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잘못 인도되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는 6-9절까지의 말씀인데,『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죽기 직전에 광야에서 40년이 되던 해,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말이었다. 신명기 말씀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홍해바다를 건넜던 옛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에게 하신 말씀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애굽으로 부터 나온 자는 광야에서 다 죽었다. 신명기 30장 11-14절에서『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사도바울이 신명기의 긴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로마서 1-3장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야 할 대상에게 회개를 설명한 장이고, 4장은 백살이 되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며, 6장에서 세례를 설명하고, 8장에 와서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말한 다음 10장에 와서 신명기 30장을 인용한 것이다. 신명기 10장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주님이 모세에게『너는 죽어야 한다』고 말한 다음에 광야에서 태어난 새 생명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신명기에서는 명령이라고 하고, 로마서에서는 말씀이라고 표현했다. 로마서가 인용한 신명기는 70인역을 인용했는데, 신명기는『바다 밖』이라고 표현했지만 로마서는『무저갱(음부)』이라고 했다. 이런 차이점들이 있다. 왜냐하면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는데, 70인역을 인용했다.
새생명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명령이다. 이들의 관심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이 명령을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나로 알게할까』이게 새생명이다. 새생명의 관심은 오직 순종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시내산의 명령은 다르다. 출애굽 하자말자 첫 해, 시내산에서는 『하라, 하지말라』는 말씀을 40일 만에 받아 왔는데, 이미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다. 홍해바다가 갈라진지 한달 반만 밖에 안되었는데,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추고 뛰놀았던 것이다. 주님이 다 죽여버리려고 했다. 40년이 지나서 금송아지에게 절했던 자들은 다 죽었다. 광야에서 맛나 밖에 먹어 보지 않은 새 생명들은『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우리가 해야 할 명령을 알게 할까』온통 순종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오직 그 명령이 심히 가까워서 너희 입에 있느니라』 라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순종의 열망으로 가득한 사람들만이 있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6절에서『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여기서『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말했는데, 주님은 모세에게『가나안에 못 들어간다』고 말했다. 네가 죽어야 광야에서 태어난 새 생명이 들어간다고 했다. 모세가 이 죽음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래서 모세는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세가 말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새 생명에게 말하는 것이다.『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다.『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헬라어로 믿음의『레마』라고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고 하셨는데, 베드로가『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라(에피토레마타)』이게 레마(upon the word)라는 말이다. 내 판단, 경험, 감정 등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대로 순종하는 삶이다. 이것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새 사람이다. 순종하는 마음이 있으면『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라는 뜻이다.
회개한 사람 만이 이 의미를 알 수 있다.『회개』는 내가 세상에서 지은 죄(허물)을 넘어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나(자아)를 깨닫고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아는 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아브람도 75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25년간 순종하지 못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신령한 음식을 먹고, 신령한 반석으로 부터 신령한 음료를 마셔도(성령체험), 그래도 주님이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셔서 광야에서 멸망당했다.
광야에서는 단 하나 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세상을 근거로 살아왔던 애굽의 사람들은 다 죽었다. 신약에서도 옛사람이 죽을 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말씀을 듣게 된다.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 10장 9-10절의 말씀이다.『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예수님이 나의 주라고 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자는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계시로 깨달은 자다.『맞습니다 주님』이렇게 시인하는 말이다.
사람들은『죄를 고백』하면 다 사하심을 얻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죄를 고백하듯『고백』하는 말이 위의『주로 시인하는』말이다. 주님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네가 행한 행동이 이런 죄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한 것이 그대로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이다『맞습니다 주님』이렇게 할 때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죄사함을 받는 것도 대부분 자기 중심이다. 죄사함을 받는 것은 주님이 사람에게 계시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회개다. 자기 성찰과 자기 깨달음이 아니라 주님이『너는 죄인이야』라고 계시할 때 회개하는 자는『맞습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은 자기의 생각과 깨달음이 아니라 하늘로 부터 바울의 다메섹에서 처럼 빛이 비춰져야만 한다. 예수님이 계시하는 것이다.『나는 주다』그럴 때 내 마음대로 살아왔던 모든 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맞습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가 아니라 요단강에서만 가능하다. 이 말을 교회 처음 나온 사람에게 적용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좋은 말로 미혹 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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