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수기 21장 8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라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에 나온지 2년쯤 되었다. 길이 험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날도 아침에는 맛나를 먹었고, 사막의 더위에 구름 기둥이 있었다. 이들은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바로왕의 군대가 물에 수장당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표현한다.
매일 기적을 경험하고 맛나를 먹고,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 주어도 그게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변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들은 원망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고 내 쫒으시고 천사들로 하여금 불칼을 들고 지키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담과 하와가 몰랐던 하나님이시다. 처음에 그들이 보았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범죄한 후 에덴동산에 공의의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복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으로 가르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죄가 없었는데, 사단에게『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속았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마귀의 밥이 된다. 구원은 주님만 바라보고 반응하는 것이다. 하와는 뱀과 대화하는 동안 한번도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바로왕이 히브리인들을 괴롭힐 때 그들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내 백성으로 하여금 예배하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하나님께서 환경을 개선하고 해결해 달라는 것』이 주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내가 창조한 목적을 먼저 행하라』는 것이다.『예배하라』는 말씀이다.『예배하라』는 말은『안식하라』는 말이다. 안식은 주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안식년은 땅을 쉬게하며, 일하는 대신 주님 속으로 들어오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어느 날을 정해서 그 날을 안식하는 날로 생각한다면 정말 안식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는 것 그 자체가 안식이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안식이 되는 것이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예배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왕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이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주신 풍랑은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풍랑이 아니라 주님 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주님을 깨울 때까지 열심히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도무지 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할 때 주님을 깨우게 된다. 그러나 주님이 잠을 깬 후 꾸짖어 이르시되『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원했던 것은 풍랑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마음이 주님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게 인간의 상식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래서 구원은 본질적으로 내적 변화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적 변화가 있다면, 어느 상황에서나 기쁜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세금으로 약 40% 정도를 바쳐야만 했다. 로마군은 갈릴리가 최전방이었다. 그래서 로마황제들 중에는 갈릴리를 주둔한 경험이 있는 장군들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셨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유대인들은 로마에 바치는 세금때문에 죽을 지경인데,『심령이 가난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오늘날 이런 기독교를 외친다면 대부분 외면당할 것이다. 이런 말은 주님을 찾는 자 외에는 받을 수 없는 그런 말이다.
고통 속을 빠져 나오고자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초대교회에서는 식민지의 정치적인 압제, 경제적인 압박이 심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참을 수 있지만, 죄의 짐을 견딜 수 없는 자들만 예수께 나아오게 된다. 오늘날도 경제적인 문제를 포함해서 다양한 문제 속에 사는 현대인들은『심령이 가난해진다면 지금이 천국이라』는 말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주님 속으로 들어갈 때 예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주님 속에서 모든 상황이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내적 변화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이 함께 한다면 괜찮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주무시는데, 배가 뒤집힐 것 같으니까 예수님에게 와서 잠을 깨우는 것이다. 누가 주인인가의 문제다. 내가 주인인가 예수님이 주인인가?
예를 하나 든다면, 인간은『더러운 물이 들어있는 작은 컵』과 같은 존재다. 이 컵을『누가 들고있는가』가 중요하다. 예수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사단이 컵을 들고 죄의 물 마시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예수님이 이 컵의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사단으로 부터 값을 주고 컵을 사야만 한다. 값을 지불하고 사는 것을 속량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사려고 하는 자들은 회개하는 자들이다.『자신이라는 컵의 물은 도저히 개선할 수 없는 썩은 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자가 회개하는 자다. 갈리디아서 3장 13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그래서 예수님이 피값을 주고 컵을 사서 더러운 물을 버리고 컵을 깨끗이 씻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맑은 물을 담아서 마시는 것이다. 더러운 물을 깨끗게 할 수는 없다. 버리고 다시 담아야만 한다. 물을 버리는 것은 인간으로 말하자면 혼이 죽는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담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사단으로 부터 예수님으로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세례는 물에 들어가서 죽고 다시 사는 것을 말한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다. 그래야 하늘로부터 새로운 것이 들어온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더러워진 것을 예수의 피로 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육적으로 죽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더러워진 것』은 씻어도 깨끗해 질 수 없다. 버리고 새 것으로 교체해야만 한다. 그래서 육적 자아(혼)가 죽어야만 된다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16장 24-25절『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막에서『불뱀은 날라다닌다』고 한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낸 것은 히브리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진노였다. 오늘날도 세상을 사랑하고, 순종하지 않는 인간들의 모든 죄에 대해서 불뱀을 보내신다. 불뱀을 물린 자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다. 여전히 마귀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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