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는 사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마태복음 16장 21-23절『이 때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자아는 사단을 이길 수 없다. 하와는 죄가 없었을 때 에덴동산에서 뱀을 만났다. 사단이 그녀를 노리면서 말하기를『하나님이 동산의 모든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였느냐?』 라고 물었다. 사단이 인간을 넘어뜨리기 위해 최초로 한 것은『생각하게 한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고 말한 것이『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먹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하와는 계명이 하나인데 그것 조차 기억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하와가 기억을 잘 못하는구나』라고 뱀이 알아차렸다.『너 하나님이 선악과를 왜 먹지 말라고 했는지 알아? 그것을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이지』라고 속였다. 사단이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다. 하와는 하나님께 뱀이 말한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잃어버린 것이 바로 예배였다. 사단에 속은 이유는 주님께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옥에 가서 고문을 당하고 내일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었지만 그날 밤 찬미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인생의 어려운 때가 오면 제일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주를 향한 기도와 예배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을 광야에서 시험하셨다. 주님은 믿음을 시험하신다. 시험하신 다음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 시험이 없다면 방종하고 교만해 질 것이다.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늘 기도와 예배가 끊이지 않아야만 한다. 그런데 하와는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와 예배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기의 생각이 올바른지 틀렸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아는 이렇게 사단의 속삭임에 쉽게 넘어간다. 자아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자아는 주님께 묻기보다는 스스로 알아내고 싶은 것이다. 즉 생각의 주인이 되고 싶고 그 생각대로 결정하고 싶은 것이다.
자아는 하나님의 것보다 사람의 것, 세상의 것을 알고 싶어 한다. 세상 상황에 먼저 반응하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이 나온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가 될 때 주님이 도우신다. 그래서 주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그러나 예배를 막는 것이 자아다. 예배는 주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자아는 주님께 반응하는 것을 막는다. 내 힘으로 해결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 자아를 주님이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영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면 주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인간은 천국을 동경하게 되고, 지옥을 가 본적이 없지만 지옥을 두려워한다. 문제는『하나님께 반응하는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길이 된다. 그러나 자아는 하나님께 반응하지 않고 내 스스로를 믿는다. 자아는 본질상 남을 배려하기 보다는 나의 관점이 더 편하고 좋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자기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비판한다. 자아는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기도 한다. 기준을 성경의 율법에 두든지 세상의 법에 두든지, 자신의 생각이 선한 것인지 아니면 악한 것인지도 스스로 판단한다. 심지어는 자아가 죄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를 성경의 율법과 세상의 법을 근거로 판단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아가 판단하고 결정한다면 이것은 율법이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자아가 죽어야『성령의 법』이 적용된다.
자아는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 자아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세례다. 변화받아야 구원받는다. 변화받는 것은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는 자아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나와 함께 죽자고』사람들을 초대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반응한 것이 자아다. 예수님이『죽어야 한다』는 말씀에『그리 마옵소서』라고 했다. 자아는 주님과 교제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일을 하거나 해외에서 선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아가 움직이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다.
인간은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아가 중심에 선다. 교회다니는 자가 이렇게 한다면 율법에 가로막힌 자일 것이다. 자아는 자기가 주인인 동시에 사단의 동역자다. 사단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자아를 부인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을 때 한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는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는『내가 순종하나이다』라고 하면서 그물을 던졌다. 그물이 찟어지도록 물고기가 잡혔다. 자아를 부인하면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어 갈 수 있다.
자아는 자기의 생각인데, 어떻게 자아를 부인할 수 있는가?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자아』라는 고유명사는 자기의 마음이고 생각이다. 그것이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혼이라는 말이다. 자아 즉 혼이라는 것은 살아오면서 형성된 지식과 경험, 감정, 노력과 의지 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지,정,의라고 표현한다. 이런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데는 반드시『죽어야만 하는 속성들』이기 때문이다. 혼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처럼 오직 영으로만 구원받기 때문이다.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단의 유혹에 걸려드는 것이며, 죄를 짓게 된다. 자아는 부활의 역사하심을 막는다. 자아는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죽어야만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속아서 범죄한 첫 사람 아담과 하와로 부터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 까지 예배와 경배를 받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인간의 능력을 보지 않는다. 예배와 순종을 본다. 그래서 옛사람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배는 자아를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순종이다. 이때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단이 주님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자아를 불러일으킨다. 자아와 타협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를 죽여야만 한다.
자아가 죽을 때 주님이 죽은 십자가와 연합되는 것이다. 이럴 때 부활의 능력이 임해지는 것이다. 교회는 자아의 무덤이 되어야만 한다. 십자가는 무덤이다. 교회가 자아의 무덤이 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자아가 춤추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예배하는 삶이 자아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것이다. 자아가 살아있는 기도는 자신을 중심으로 환경을 변화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기도하는 그 사람이 변화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자아가 살아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 것이다. 자아가 죽은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는 기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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