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어떤 의미인가
누가복음 17장 20-21절『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 관계 사이에 나타나신다. 두명이 모이건 수만 명이 모이건 숫자에 관계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변한 적이 없다. 여기, 저기가 아니라 예수님 속에 있다. 그래서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자 속에 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서 나타나는 곳은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자들 가운데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나타난다는 말이다. 성도들은 거듭나서 위로부터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도라고 칭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교회에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결심했다고, 죄가 없어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로 하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어떤 상황이라도 주님이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교회생활을 잘 하면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나』라는 존재는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다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사람들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은 하면서, 자신들의 성실한 행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긍휼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결심해서 거룩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생명을 받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행실이 나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고난이 다가왔지만 역경을 넘어 재기에 성공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한다. 그래서『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는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는 현실이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 욥이 회개한 것 처럼, 하나님은『인간들이 회개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신다.『얘야 쓰러지지 말고 일어나라』가 아니라『너 회개해야 할 존재야, 회개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겨봐』를 원하시는 것이다. 두 문장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은 자기 정체성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고, 뒤의 것은『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맡겨라』는 말이다.『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주님의 말을 통해서 답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다가 그들이 스스로 결단하여 예수를 믿게되었으므로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거짓 교사들이『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은 성령이 사람들 안에 역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성령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성령 안에 있으므로『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성령이 믿는 자 속에 들어와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자신』이라고 하는 주체가 죽어야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죽는다』는 말은 육체가 아니라 육적 마음이 죽는 것을 말한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예수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어려운 고통 속에서 주님이 역경을 이기게 해주었다고 믿지만, 결국 『주님이 역경을 헤쳐나간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구원자 예수가 그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다. 주체가 누구인가? 삶의 중심이 나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오직 나를 위하는 예수는 자신이 만들어낸 예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사랑의 하나님 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22절에서『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이 말씀은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자기의 것을 먼저 포기하라』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 중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경을 읽어면서 자신에게 좋은 말을 찾아서 적용하려고 한다.
예수님은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전심으로 찾는 자에게 나타내신다. 『전심으로 찾는 자』는 스스로는 죄악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을 회개하는 자를 말한다. 단지 상황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그런 전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런데, 그 말씀 중에서는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말들이 있다. 어떤 경우는 재물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어려움의 해결과 성공이 될 수 있는데, 성경은 그것들을 목표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세례요한이 말하거나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말할 때나 전반적으로 재물에 대한 것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이 목표가 될 때 그것들이 신이 되는 것을 본다.
루터는『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하면서 종교는 개혁했지만,『주머니는 개혁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재물의 신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보화와 사람들이 차지하려는 물질의 보화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자와 이루지 못하는 자의 차이처럼 선명하다.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이『모든 재물을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했을 때, 청년은 슬픈 기색을 하면서 예수님을 떠났다. 이 청년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활용해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국에는 갈 수 없다. 이 사람이 예수를 버리는 순간 천국에 못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목표가 어떤 신이 되었는가? 그 신이 세상의 것이라면,『버리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재물, 행복, 성공이 신이 되었다면, 세상의 신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오직 그의 나라를 구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누가복음 18장 24-27절에서『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믿음은『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따라서『내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거짓이다. 고난 속에서 성공을, 역경 속에서 행복을 가져준다고 해도, 사랑의 하나님 만을 생각한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중심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떤 상황에서 그 상황을 해결하는『사건』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내적 변화』다. 구원은 외부에서 성공이나 행복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변화다. 물과 성령으로 생명이 변화되는 것이며, 주인이 나로 부터 예수로 바뀌는 내적 변화다. 이런 자들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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