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어


로마서 3장 19절『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자인지, 은혜 아래 있는 자인지 모르고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심판과 지옥에 대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많은 교인들이『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심판에 대해서 말해야 할 사람들도『교인들이 싫어하니까』말하지 않는다. 지옥이 두려운 자는 죄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다는 증거다.
죄를 가까이 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있는 자도 자신이 율법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죄 아래 있다는 것과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의 상태는 같으나 서로 다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모르면 죄 아래 있는 것이다. 죄 아래 있는 자는 죄를 깨닫지 못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죄 아래 있는 것을 깨닫는 자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데,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 아래 있어서 못 견디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은 마치 사단이 이 세상에 없는 것 처럼, 죄가 없는 것 처럼 즐겁고 재미있게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결국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사단은 넘어 뜨리려고 하는 자에게 죄를 짓게 한다. 사단은 그냥 두어도 죄를 모르는 자에게는 시험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자는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경이 왔을 때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하나님으로서 믿는 것이다. 탕자의 하나님을 붙잡고 있다.『달라는 대로 다 주시고, 돌아오면 그대로 품에 안아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전략이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마지막 비유로 하셨다. 탕자의 비유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안 나온다. 그런데 그 앞의 두가지 비유가 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죽어있는 동전의 비유다. 예수님이『이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라고 하셨다. 목자가 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버린 것이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목자가 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이 목자를 버렸기 때문에『회개하라』는 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이것이 죄다. 예수님이 위의 두 비유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해준다.
죄는 내가 지은 죄와 아담으로 부터 부모를 통하여 내려오는 죄성이다. 내가 지은 죄를 허물이라고 한다. 이것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다. 양(죄를 지은 당사자)의 비유와 탕자(자녀)의 비유 사이에 짐승보다 못한 죽어있는 동전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동전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돈 잃어버린 여자가 회개해야 하는 내용과 같이 생각된다. 동전은 죽어있는 상태다. 여자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죽은 동전이 회개하라』는 말이다. 이 동전의 죄는 아담으로 부터 전해내려 오는 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동일하게 예수님이『이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번째 탕자의 비유에서『이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비유에서 아버지가 말하기를『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찾았다』고 말했다.『더러운 것을 씻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탕자』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표현이다. 아버지는 자기를 버린 아들을 탕자라고 부른 적이 없다. 누군가 성경의 제목을 그렇게 표현하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잃어버렸던 아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말한다.
앞의 두 비유(잃어버린 양과 동전 드라크마)는 허물로 더러워진 상태와 죄로 죽은 상태를 나타낸다. 세번째(탕자의 비유) 비유는 죽었다가 살아난 거듭난 자녀의 비유다. 이 세가지 비유의 말이 로마서 전체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 돌아오는 것인데,그러나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죄를 어떻게 버릴 수 있는가』라고 생각한다.『인간이 버릴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오셨지』이렇게 생각한다. 죄를 용서받으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당장 내일 죄를 지을 것을 예상하고, 죄를 버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죄를 처리할 수 없으므로,『예수님이 죄를 자백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단이 죄사함의 개념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구원의 조건은 두가지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이다. 회개는 하나님께 하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믿은 그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적 생각이 죽어야만 가능하다. 예수님이 하신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 동전의 비유가 바로 이 내용이다. 내가 지은 죄는 나만 회개할 수 있다. 이게 허물이다. 그런데 사단이 섞어버린 것이다.『인간이 어떻게 죄를 버릴 수 있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인간이 스스로 할 수 없으므로 예수가 왔다』고 말을 한다. 그럴듯하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그런데 로마서 3장 19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다. 사람들은『무슨 소리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은혜 아래 있는데?』라고 한다.『예수 믿은 지가 얼마인데? 죄를 고백하고 은혜 체험하고 축복받고 얼마나 교회생활이 좋은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세례는『물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세례를 죄를 씻어 하나님 백성이 되는 하나의 의식쯤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좀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자기 십자가를 삶의 고난을 견디는 정도로 생각한다. 교회에 와서 은혜와 축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한다면 이런 말이 귀에 들리겠는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죄다. 그 죄는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은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무슨 죄? 세상에서 지은 죄를 포함해서 육적 자아가 죽지 않은 죄다. 사람들은 세상죄만 생각한다. 세상죄는 우리가 고백한다고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육적 자아가 죽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세상죄를 사해주는 것이다. 뿌리를 그냥 두고 열매 만을 보고 말하는 이치다. 성경은『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다. 이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통과하지 않고는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죄를 고백만 하는 자는 회개하지 않은 자다. 죄와 단절해야만 한다. 성경에『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지 사랑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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