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장 2절『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바울은『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죄를 용서받고 씻으려고만 한다. 죄에 대하여 죽어야만 구원이 시작된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과 씻는 것의 차이는 죄에 대한 주체가 죽는가 아니면, 그냥 살아 있으면서 깨끗게 하는 것인가의 차이일 것이다. 죽지 않으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죄를 짓는 주체가 살아있으면서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됨을 믿는다고 한다면, 삶의 현장에서는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죄를 짓고 죄를 용서받으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요한1서 3장 8절에서『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라고 했다. 요한복음 8장 11절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에게『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시니라』에베소서 4장 26절에서도『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죄를 짓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계속 죄를 짓고 용서받으려고 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이 되었다. 그 이유는『자기』라는 존재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죄를 계속 짓고 주님의 피로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자는 결국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요한1서 2장 15절에서는『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귀는 택하신 자도 미혹하려고 한다. 구원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허물은 세상죄를 말하며 죄는 원죄를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는 열심히 사는데,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6장 2절의『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2장 1절의 말씀과 로마서 6장 2절의 말씀 사이가 바로 회개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인간이 회개하여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를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말씀하신다.『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교회 안에서도『세상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많은 교회 안에서 성공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의 축복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원받았다고 말들을 한다.『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요, 그리고 예수님은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당신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죽었다는 말은 믿기만 하면 되지만 자기가 죽지않는 회개없는 믿음은 거짓이다. 이들은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말하는『죄에서 죽은 자들』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에게는 살아계신 주님은 오시지 않으신다. 오직 회개하고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게만 주님이 성령을 보내시어 함께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게 영접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의미도 모른채, 영접 기도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서『전에도』라는 말은『회개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죽지도 않은』이라는 말이다.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자들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자다. 그래서『모든 사람이 진노의 자녀』라고 한다.
에베소서 2장 4-5절에서『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것에 대해서 로마서 6장 3-4절에서 설명한다.『무룻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즉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시는 자는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거의 잘 하지 않는다. 세례의 형식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이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예수와 함께 하지 않는 세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례가 죽고 사는 것이 없으면 잘못된 것이다.
바울의『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안에 거할 때만 부활 생명이 역사하실 것이다. 회개없이『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발판삼아 성령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성령의 기쁨, 은사, 능력을 추구한다. 십자가를 조금이라도 벗어나 성령을 추구하면 악령이 접근하게 된다. 사단은 구원의 첫 단계를 건너 뛰게 만든다. 회개없이『예수믿으세요, 영접하면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거짓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진노하신다. 그러나 이 말을 거의 잘 하지 않는다. 회개를 말하지 않고『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거짓 구원이라는 말이다. 좋은 말만 따라가면 영적인 희생물이 될 수 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모든 프로그램을 잘 따라 한다고 하더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거듭나야 영이 살 수 있다. 삶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다면 아무리 구원을 외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예수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죽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 오직 십자가 외에는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다. 전도는 이것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요』라는 단순한 말로 구원을 말한다면 곤란하다. 전도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삶 속에서 전도가 필요하다. 삶이 닿는 사람에게 전할 때 그 삶이 말이 되고 삶이 메시지가 된다.
구원의 시작은 영접이 아니라『내가 죄로 인해 어둠이구나 내가 죄로 죽은 자구나』라는 것을 고백하고 예수와 함께 죄의 모든 것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회개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처럼 죄를 씻는 것이 아니다.
허물과 죄로『죽은』우리는 예수와 함께『죽어야만』한다. 앞에서 말하는 죽음은『영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은 혼(자아)의 죽음이다. 혼이 죽어야만 영이 살아난다. 혼이 죽을 때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신 것 처럼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와 같이 영을 살리실 것이다.『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이게 거듭남이다. 회개하고 예수와 함께 죽는 자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처럼『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가 된다. 혼이 죽지 않으면 모든 판단은 자기가 주체가 되기 때문에 자기 율법에 갇히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죄를 판단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적 마음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줄 때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그 끝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을 깨닫는 자만이 복음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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