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디도서 1장 1-2절『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인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한 것인데』
여기서 세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요즘은『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라고 말한다.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가? 베드로후서 1장 9절『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장 9절 앞에는 일곱 가지 덕목에 대해서 말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다. 사랑을 마지막에 언급했다.『아가페』라는 사랑은 그냥 안 생긴다. 아가페라는 것은 인간 속에 없다. 이것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회개하는 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쌓여서 맨 마지막에 아가페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말은 요한1서에 가서 두번 나온다. 요한복음에는『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고 했지만『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렇게 명제를 말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 말씀』에서『이 처럼』사랑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이 처럼』 사랑하시니까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믿음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은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임금과 같다』고 했다. 아들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인데, 이 잔치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것이다. 3절에서『그 종들을 보내어 청함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땅을 사서, 소를 사서, 결혼을 하기 때문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 이유가 그럴듯하다. 예수님의 죽음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제물이다. 예수의 죽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경전체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건 자기 아들을 보내건 인간은 천국 잔치에 오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의 잔치를 예비해도 타락한 인간은 다 오지 않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서 성경 지식을 쌓고, 기도를 해서 은혜를 받지만, 자기가 좋아서 한다면 의미없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사울 당시 평생 성경을 읽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는데 쓰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헤롯왕이 제사장과 서기관을 다 불러서 물어보았다.『메시야가 어디서 태어나느냐?』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베들레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평생 쌓은 신앙적 지식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쓰임받고 말았다. 오늘날 성경을 많이 안다고 그것이 꼭 『예수님을 위해 쓰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다『예수를 죽이는데 쓰인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초청해도 다 오지 않는 것이 천국 혼인잔치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을 초청해서『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하지만, 권세를 주시는 것은『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로서 난 자들이니라』교회 처음 나오자 말자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에서『영접할 수 있는 자』는 『거듭난 자』를 말하는 것이다. 거듭나지도 않았는데,『당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면, 중세 때의 상황과 뭐가 다를 수 있는가?
교회 처음 나온 자들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실들을 증명하게 하고, 지적으로 동의를 얻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섬겨서, 그들이 『나도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결단하는 것이 회개인 줄로 생각한다. 회개는『예수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인간은 하나님의 길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길은 십자가 예수의 길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아들을 보내도『아들을 죽이면 저 기업이 우리 것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지『나도 예수와 함깨 죽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회개를 제대로 말하지 않고 구원을 말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회개는 인간이 죽을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의 십자가와 연합되어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24절에서『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라고 했다. 마태복음 22장 14절에서도『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고 했다. 디도서 1장 1-2절에서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편지하면서『내가 사도가 된 이유는 택하신 자들의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구원의 확증은 택하심 부터이다. 혼인잔치에『청함을 받은 자』들이 오기를 싫어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로 청하고 있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청함을 받아 혼인잔치에 왔지만, 예복을 입어야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에 들어와야 택하심을 입는다. 회개하고 예수의 십자가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혼인잔치의 예복을 입은 자』다. 예복을 입는 것은 혼인잔치의 주인을 위해서 입는 것이다. 혼인잔치에 초청받았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초청받아서 와도 예복을 입어야만 한다. 예복을 입지 않으면 혼인잔치에서 쫒겨날 것이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초청받으면 잔치에 와야하고 예복을 입어야 구원받는다.
예수의 십자가로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이므로 혼인잔치에 초대해도, 오지 않는 것이다. 삼년 동안 온갖 기적을 보고, 영적 체험을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다.『누가 주인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삼년 동안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는데, 예수님은『오늘밤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하셨다. 왜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연합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회개없이 십자가를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가 바로 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 없다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를 버릴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회개하고 자기 부인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예수의 십자가와 연합되게 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와 연합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 주신다. 오직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회개를 통해서 자기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이다.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은 결국 주인이 자기가 되는 것이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 그 속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유는 바로 인간들의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죄 때문에 죽으셨는데, 죄의 결과만 용서받으려고 하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자기』라는 것이 죽지 않는다면,『예수를 죽이려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노아의 당시『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120년간 외쳐도, 처와 세명의 아들과 며느리 외에는 믿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가족과 친척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의 생각을 믿은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를 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구원의 말씀을 분별하고 따르려고』하지 않는 것이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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