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인 동의와 다른 믿음


요한복음 20장 31절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 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도마에게 보이시고 하신 말씀이다. 도마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도마가 없었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을 보지 않는 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당시 부활을 안보고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이『죽었다가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데, 정말 믿는 것인가?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해 주었는데도 믿지 않았는데, 오늘날 목격한 자도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말하는가?
지적인 동의는 믿음이 아니다. 죄를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성경을 암송하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어도 지적인 동의는 죄를 이기지 못한다. 지적인 동의는 육체가 믿기 때문이다. 육체 속에서는 구원받는 믿음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혼과 영을 찔러 쪼갠다. 요한복음 5장에서『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들이다. 회개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영이 죽어있어서 『자기』라고 생각하는 혼으로 사는 것이다. 혼을『지정의』라고 한다. 『지정의』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대로 지었다는 형상은 영이다. 혼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영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영이 죽어버렸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숨어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주셨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지만, 영이 죽으면 하나님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피하고 싶은 자는 바로 혼이다. 누가 육체의 주인인가가 중요하다.
영이 살기 위해서는 항상 어린양의 가죽옷을 입고 있어야만 한다. 육체가 죽을 때까지 매일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 죽음 안에서 거해야만 영이 살 수 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은 두 가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도마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도『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고백이 계시된 믿음이지만 구원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출애굽시 하나님이 모세에게『오늘밤 어린양을 죽여 피를 완전히 빼어 그 피를 문설주에 칠하라』고 하셨다. 피를 칠한 집 안에서 양의 고기를 불로 구워서 먹게 하셨다. 그리고 먹고 남은 고기를 태우도록 하셨다. 어린양의 흔적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히브리 백성들은 모두 다 따랐다. 그것이 믿음이지만 구원받는 믿음은 아니다. 그 다음 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를 나와 가나안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구원받을 믿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출애굽에서 부터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전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출애굽했다고 해서『구원받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예수믿게 되어서『구원받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은 죽을 때까지 전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회에 나와서 죄를 고백하고 1시간 여 만에 영접 기도하고『구원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게 구원의 확증인가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구원의 핵심은 죄 용서가 아니라, 죄에 대해서 옛사람(혼)이 죽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지 않는 한, 매일 회개하고 죄 용서받으려고 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옛사람이 죄를 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죄를 회개하고 또 죄를 짓는 일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가나안 앞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옛사람은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옛사람은 육으로 비롯된 혼이기 때문에 육의 생각이 반응한다.『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의 생각에 반응하는 옛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탐욕이 생기고 죄를 짓게 된다. 요한1서 2장15절에서『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했다.
옛사람이 죽는 길은『내가 옛사람의 정체성을 없애겠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옛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깨닫고, 날마다 자기 부인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적인 나의 믿음이 아니라,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만 한다. 생활 속에서 나타나지 않으면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지적 동의인 자기 믿음이라고 한다.
생활 속에서 믿음이 나타난다면,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세상의 재물과 염려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할 수 없듯이, 영과 혼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부활하신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이 영접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 옛사람이 죽어야만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구원의 확증이 아니다. 귀신들도 믿고 떨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에서 회개할 기회를 얻었지만 옛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 처럼, 오늘날도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의 기준은 애굽을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애굽을 나오는 것에 대해서, 교회에 나오는 날 출애굽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 즉 옛사람이 죽어야만 하는데, 교회 나오자 말자 『자기 부인의 길』에 들어서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교회나온지 얼마 안된 사람에게 영접 기도한다고 구원이 이루어지겠는가?
예수가 주인이 되어야만 요한복음 20장 31절의 뒷 부분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가 적용된다. 예수가 주인이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이 영을 살리는 힘을 갖게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30절에서 제자들이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이다.『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예수님이 제자들이 믿는다고 하니까『너희들이 믿는다고?』 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바로『너희들은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믿음』이라는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은『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내가 믿는 믿음』이『예수를 부인할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나』와『예수』라는 두 이름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가? 믿음의 객체는 누구인가? 잘 깨달아야만 한다. 믿음의 주체는 예수님이고 믿음의 객체는 하나님이다. 나는 믿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속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다. 예수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없는 것이다.『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지적 동의의 믿음은 예수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믿는 지적 동의를 바탕으로 예수 속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저 문이 『구원의 문이구나』라고 말한다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을 바꿔 입어야만 한다. 예복을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문으로 들어가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복은 나를 위해 입는 것이 아니라, 잔치를 초대한 자를 위해서 입는 것이다. 예복이 바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다. 십자가의 예수를 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천사가 지키는 불칼이다. 죄를 지은 혼이 불칼을 맞고 죽어야만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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