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욥기 19장 23-25절『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을 고난의 상징처럼 알고 있다. 욥은 하나님을 잘 믿는 자였는데, 사단이 그를 송사했다. 사단은 믿는 우리도 송사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단에게『그러면 욥을 쳐라』고 허용하신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재물이 다 날라가고, 자식이 죽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욥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런 와중에 부인은 욥의 신앙을 비웃게 된다.『차라리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다. 그리고 몸에는 병이 나서 잠을 잘 수 없게 되었다.
욥의 친구들이 와서 처음에는 그를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렸지만, 그 눈물이 마르면서 비판으로 바뀌게 된다. 욥의 친구는『이유없는 어려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너에게 죄가 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죄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오늘날 죄 때문에 어려움이 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경에는 죄를 계속 짓지만 세상에서 잘 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욥은 그렇게 응답하는 것이다.
하박국에서 말씀하고 있다. 1장에서는 악인이 의인을 둘러쌌는데, 왜 주님은 잠잠하시는가? 나는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왜 주님은 잠잠하시는가? 라고 말한다. 2장에서는 주님이 기다리라고 하신다. 그가 주님 앞에 기다리는데,『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면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보여주신다.『아 주님이 심판하시는구나』마지막에는 오직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하라는 것이다. 3장에서는 찬양하게 된다. 무화과 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어도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 믿음을 욥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욥이 처음에 이런 믿음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는 불의하지도 않았지만,『자기 의』에 빠져있었다. 결국 많은 고통의 결과는『자기 의』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이 욥을 비판하는 친구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는 욥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욥이 자신을 낮추시는 주님의 계시를 바라볼 때 욥은 하박국이 말하는『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깨달았고, 욥기 19장 23-25절을 말하는 것이다.『반드시 기록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오늘날도『자기 의』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이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어도,『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하는『돌에 새겨져서 잊혀지지 않는 말씀』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욥은 19장 25절에서『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대속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욥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받더라도『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를 붙잡을 때, 그의 믿음의 통로를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던 것 처럼,『포기하고 죽어라』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자』의 구속자가 되신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구속자가 아니라 구원자다.『구원해 달라』는 말이다. 구원하기 위해서는 악의 세상에서 건져내는 것인데, 악의 세상 주관자가 사단이다. 결국 사단으로부터 피값을 주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자가 되는 것이다. 구속자라는 말은『너는 내 것이야』라는 말이다. 소유권의 이전이다. 우리가 낮아질 때, 스스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정결해야 되지만 정결에 앞서 낮아져야만 한다.
신명기 8장 2절에서『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여기에서『시험하는 것이 정결케하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낮추게 하신다. 광야에서 낮추게 하셨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들의 존재성을 낮추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한다.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
사무엘 앞을 지나갔던 이새의 일곱 아들 앞에서 주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사무엘아 사람을 외모로 보지마라 나는 그들을 버렸느니라』그랬더니 육신의 아버지도 관심두지 않은『막내 아들이 있나이다』라고 했다. 사무엘은 막내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 막내 소년이 이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다. 사무엘도 이새도 몰랐던 것이다. 낮아지지 않으면 주님의 답은 보이지 않는다. 낮아지는 것은『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애굽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낮아지는 것이다. 어려움이 올 때 깨닫고 낮아져야만 한다.
신명기 8장 16절에서『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주님이 먼저 낮추게 하신다. 요셉이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절한다고 했다. 이 때부터 요셉은 은 이십냥에 팔려가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된다. 이 시련이 그리스도의 계시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요셉이 바라본 것은 오직 믿음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낮추고 또 낮추신다. 요셉이 아버지의 집에서 꿈을 꾸었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이 없었지만,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 종살이 할 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연단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가롯유다에 의해 은 삽십냥에 팔려갔던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다. 우리가 어느 정도 낮추어져야만 하는가? 우리는 팔려가는 종의 수준에 있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다. 그래야 사단으로 부터 주님께 낮아진 사람들(종)이 팔려가는 것이다. 주님께 팔려갈 때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오든지 그 속에서 주님은 낮추게 하신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계시하는 것이 곧『너도 나처럼 십자가에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등장한다. 그녀는 요셉을 죄로 묶어 팔아버린다. 감옥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요셉은 죄짓지 않았다. 죄짓지 않기 위해 자기의 옷을 벗어버렸다. 그런데 그 옷 때문에 증거가 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님은 보디발을 통해 낮추게 하시고, 보디발의 아내를 통하여 시험하셨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내일은 더 어려운 삶을 살 수 있을지라도 주님이 낮추게 하시고, 시험하시는 것을 깨닫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는 것이다. 그 계시는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계시를 깨달을 때 주님 속으로 들어가는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서『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요셉에게도, 욥에게도『마음의 사형선고』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할 때, 시편 40편 1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것처럼『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가 되는 것이다.『기가 막히다』라는 표현은『정말 대단하다』가 아니라『숨이 끊어진다』는 표현이다. 마음의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다.『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이 분이 우리의 대속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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