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안에는 생명 만 들어간다
요한복음 20장 31절『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앞에 나오는 말씀은 도마에 대한 내용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부활을 보았다고 하는데, 도마가『당신들이 다 부활을 보았다고 해도, 나는 예수의 손바닥과 옆구리의 못자욱을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도마가 안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삼년 동안 말씀했다.『나는 죽으러 왔는데,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도 이 말씀을 기억했다. 그래서 심지어『무덤에서 보초를 세워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알기는 아는데,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게 인간의 생각이다. 자기가 직접 육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철저히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부활로 인해서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처럼『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했다. 예수님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인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성막이다. 주님이 안 계신 곳은 없지만 아무데서나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하늘의 모형을 보고 만든 것이 성소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방법은 하늘의 모형대로 사는 길 외에는 없다.
성전에 들어가면 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놋 제단에서 짐승을 죽여야만 한다. 죽인 다음에는 반드시 물두멍에서 물로 씻어야 한다. 성전 마당에서는 두 가지가 역사해야만 한다. 제물이 죽어야 하고 죽음을 기초로 해서 씻어야 하는 것이다. 성전 마당이 길이다. 이 세상의 하늘이 보이는 곳이다. 성소에 들어가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감람유의 등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진설병의 떡이 있는데, 이 곳이 진리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간다. 지성소에서는 법궤가 있는데, 바깥에서는 만나가 시간이 지나면 썩지만, 법궤 안의 맛나는 썩지 않는다. 그 옆에 싹난 아론의 지팡이도 있다. 이게 영생이다. 지성소 안에는 생명이 역사한다.
제사장이 지성소 안에 피를 힘입어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만약 지성소 안에서 합당치 않으면 제사장이 죽는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에 방울을 달게했다. 유대인의 역사에 제사장의 발에 밧줄을 매었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지성소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곳이다. 생명이 역사하는 곳은 두려워 하는 곳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에 대한 내용이 성막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성전 마당에만 들어가도 생명을 얻는 것 처럼 가르친다. 바로 예수를 영접하라는 것이다. 죽음이 역사하기 전에는 생명이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믿음 만이 구원의 시작이다. 양을 죽이는 자가『양이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깨닫고,『죽은 양과 연합되는 것』이다. 내가 죄를 속죄받으려고 예수를 죽였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죽은 시체 예수가 바로『나』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삼년 동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믿었지만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대제사장의 손에 죽는다』는 말은 제물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제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성소 마당에서는 죽은 고기를 불로 태워서 영문 밖에 재를 버리지만, 성소 안에는 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주님은 육적 죽음을 이렇게 싫어하신다. 왜냐하면 육적 혼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탐욕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피 속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성소 안에는 생명 만 들어간다.
성전 마당에서 죽음(육)은 뒤로 나가고 생명(피)은 안으로 들어간다. 그 피가 지성소에 들어가면 주님의 거룩한 영의 역사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의 모형을 사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이다. 모형을 사는 사람을『성도』라고 한다. 교회 처음 나온 사람에게 부르는 성도가 아니라 참 신자를 말한다. 그래서 주님이 성도들에게『너희가 성전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배당이 성전이 아니라 성도가 성전이다. 성도들이 모인 곳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성전인 성도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신약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전 건물의 휘장이 찢어졌을 때부터 신약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이 죽기 전날 밤에『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다. 평생 예배드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모형이 우리의 삶이 될 때만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의 순서가 삶의 순서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소 마당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 애굽을 나온 옛사람이 광야에서 죽어야만 새 생명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광야에서는 생명을 파종할 곳이 없다. 광야는 회개하는 곳이다. 그래서 회개의 완성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너는 율법에 속한 자야 율법에 대해서 광야에서 죽어야만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모세는 죽음을 받아드렸다. 모세는 죽고, 요단강이 갈라지며, 새 생명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가나안이 생명을 파종할 곳이다. 가나안에는 아낙자손들이 살았다. 그들을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지만 영을 괴롭히는 육적 혼이 있기에 혼을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교회를 나갔더라도, 삶이 생명을 파종할 수 없는 모래같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광야에서『물을 달라 고기를 달라』고 하는 것 처럼,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반석으로 부터 물이 솟아나왔지만 옛사람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 오늘날 기적을 체험하고 기도응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옛사람이면 반드시 죽게된다. 자아가 죽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옛사람이다. 옛사람이면서 새 언약을 붙잡고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새 사람이 새 언약을 붙잡아야 구원을 받는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죽었기 때문에 죄가 죽은 자를 건드리지 못한다. 사람은 죽어도 죄는 살아있으며 이전된다. 오직 살길은 죄에 대하여 죽는 길이다. 세상에서 지은 죄(허물)와 원죄로 모든 인간의 영이 죽어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 없다. 먼저 회개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어 옛사람이 죽어야만, 죽은 영이 살아나고, 그 다음에 예수를 영접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은 요단강을 건너야만 한다. 요단강을 건너간 후 길갈에서 여호수아가『드디어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말했다. 길갈은『굴러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요단강을 건너갔다고 믿고있으며, 믿는 사람들과 이를 인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소경이다. 죽어야 할 사람에게『예수를 영접하라』고 말하고,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할 옛사람에게『죄를 씻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죽어야 할 옛사람을 그대로 둔채, 그 죽어야 할 옛사람에게 성령을 받게하는 것이다. 이게 많은 교회에서의 현실이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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