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1장 25-27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베다니』라는 가난한 동네에서『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었다. 그때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르다가 나온 것이다. 마르다에게『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했는데, 24절에서『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 교리에 해당한다.
교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지식에 불과하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 사데교회에 말씀하시기를『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자』라고 하셨다. 성경 지식으로 말을 하고 두뇌 속에서 지식으로 쌓여있을 수 있지만,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고 참 나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지니』에서『진리를 안다는 것』은『체험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성경 지식이 쌓여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받드는 자라야만 한다. 마르다가 말한 것은 지식으로 다 아는 내용이다.
예수님이『너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와『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의 차이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24절에서『내가 바로 부활이고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죽은 후에 언젠가 다시 살아나겠지』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과거형이다. 영어로 보면『though he were dead, yet shall he live』나를 믿는 자는 죽었었지만, 살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믿는 자가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죽어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니까 내용이 이상해진 것이다. 영적으로 살아서 믿어야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살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생명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을 바라보는 자는『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를 언젠가 육체적으로 죽으면, 다시 부활한다는 단순 논리로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를 말한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했는데,『살아서 믿는 자』라는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은 연결되어 있다.『믿는 자는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살아나고, 영적으로 살아서 믿으므로 영생한다』는 말씀이다. 영이 살아나서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그리고 26절에서 예수님이『이것을 믿느냐』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르다가 27절에서 답하였다.『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이 고백은 성경 지식으로 아는 말이다. 이 고백은 예수님과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고백이다. 자기가 원하는 생각을 예수님께 주입하는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와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 때 부활은 생명의 부활로 나가지 못하면 심판의 부활로 나갈 것이다. 영적으로 죽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살아나야만 생명을 얻게 된다. 다 부활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를 믿건 안믿건 마지막 때는 다 부활한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아닌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간다.
오늘날 많은 교회 안에 마르다와 같이, 부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많을 것이다.『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한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생명의 부활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아있지 못하면 생명의 부활로 나가지 못한다. 주님이 말씀하실 것이다『너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은 자로다』
성경에 나사로가 죽었지만 예수님은『그는 잔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영이 죽은 자를『죽었다』라고 표현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를 말한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서『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에서 듣는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한다. 그래서『내가 죽은 자구나』라고 깨닫는 자만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말이다. 5장 28-29절에서『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마르다가 말한 것은 바로『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를 믿는다는 말이다. 지금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은 잠자는 자들이다. 악한 자들도 다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그 때는 늦는다. 왜냐하면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구원의 시작은『자신이 어둠 속에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더러움이 해결된다.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살아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단순히 부활을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이것을 믿느냐』라고 마르다에게 물으셨다.『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부활합니다』라고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두번째 말씀처럼『영이 살아나서 믿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마르다는 두번째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는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데, 마르다는 성경 지식에 대한 사실 확인에 급급한 것이다.
영적으로 살아서 믿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영이 죽은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영이 곧 생명이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예수님이 살아난 영을 붙잡아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사데교회에 말씀하신『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하셨다. 회개하지 않으면 영이 살아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죄에 대해서만 회개하는데, 원죄의 뿌리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 자아는 원죄의 뿌리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죄의 뿌리인 육적 자아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아의 생각을 부인하는 것이 죽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만 할 수 있다.
내가 믿기로 한 믿음은 구원받지 못한다.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믿음의 선물을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영적으로 살아나야만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육적 자아를 하나님 말씀 앞에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는 죄의 뿌리가 죽는 것이다. 구원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길은『회개하는 것』외에는 도무지 할 것이 없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하늘에 계시는 예수께 나가는 것 보다 이 세상 풍랑 위에 계시는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이 세상의 풍랑은 세상의 염려와 걱정들이다.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기 위해서는 회개하여 영이 살아아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게 힘든 자는 자신이 정말 회개했는지 살펴보아야만 한다. 베드로가 매일 매일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성경의 지식을 쌓아도, 풍랑을 보면서 물에 빠지는 것을 깨닫는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풍랑을 바라본다. 주님이 풍랑에 서 계신데도, 풍랑에 반응하면 주님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풍랑에 반응하여 주님께도 갈 수 없는데, 어떻게 보좌에 계신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내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주님이 회개하는 자에게 영의 생명을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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