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자


갈라디아서 3장 26-27절『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거듭난 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받는 식은 안된다.『예수를 영접하면 예수가 내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듭난 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님께 영광돌리는 장차 미래의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지금 영광을 돌리는 삶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의 거듭남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혼 구원이 있는 열매 맺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 예배가 열매는 아니다. 사도바울은『이방인이 회개하여 주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산 제물로 드린다』고 했다. 제자가 되는 삶이 있어야만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떤 모양이든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은『미지근하면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했다.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예수님이 주인인 자이고, 예수님으로 부터 구속된 자다. 그렇게 되어야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된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구속이 없는 영접은 없다. 구속이 없는 믿음은 3장 23절에 해당한다.『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이게 아브람이 75세에서부터 99세에 이르기까지의 상태다. 율법에 갇힌 상태를 말한다.『육체를 따라 난 자를 이스마엘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다. 이삭 만이 성령으로 난 자라고 말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에서 말하는 믿음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의 믿음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고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니고데모는 이 말씀에 답이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믿는 랍비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찾아온 자다. 요한복음 3장 2절에서『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이렇게 말한 니고데모였지만 예수님의 하신『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민수기에서 백성들이 원망해서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셨다. 백성들이 불뱀에 물리자 모세가『놋뱀을 쳐다본 즉 살리라』라고 말했다. 바라보면 산다는 말이다. 이 말을 믿는 것이 순종하는 믿음이다.『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믿는 것이 순종이다. 순종없는 믿음은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일 뿐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죽지 않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세번이나 죽고 부활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다.
니고데모는『내가 뱀에게 물린 자 란 말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니고데모는『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인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적타락의 주범인 뱀의 독에 물려있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 많은 교회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나의 구주라고 말은 하지만, 뱀의 독이 퍼진 자라고 하면 화를 낼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원죄가 사람들 속에 여전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뱀에 물려있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자만 놋뱀과 같은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그 피로 다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지적인 동의에 불과하다. 베드로처럼『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믿는다고? 오늘밤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하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이와 같다는 말이다. 죽은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어야만 한다. 주인이 죽었는데, 내가 멀쩡히 살아있으면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함께 죽는 자가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자가 아닌가? 이게 회개다. 회개는 내가 뱀에 물린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높이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회개다. 바라보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가 되려면 자기부인의 길로 가야만 한다.
신앙은 죄사함을 받았을지라도 온전한 회개를 통하여 나는 죄밖에 없는 전신의 문둥병자이므로 항상 죄인의 모습으로 서는 신앙이다(눅18:13-14)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으므로 회복불능의 죄인이기에 나를 심판하여 죽었으므로, 주님이 다시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죄밖에 없는 완전한 죄인이 된 그 자체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정하다고 하는 것이 죄사함이다. 죽지 않으면 죄사함도 없다.
나를 심판했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이다. 죽은 자는 심판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랐는데, 죽어버리면, 죄를 따질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계속 수사 대상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다. 육체 속에 혼이 죽어버리면 하나님이 육체 속의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시는 것이다.
야곱의 사례를 통해서 혼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았다. 야곱은 하나님이『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라반이 두려워서 밤에 야간도주 한 것이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는데도 인사도 못하고 도망하는 것처럼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 고향가까이 얍복강에 도달했는데, 형 에서가 두려워서 식구들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만 홀로 남는다. 철저히 혼이 살아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군대가 나타나고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했는데, 두려운 것이다. 철저히 혼적 자기인 것이다. 그래서 믿을 능력이 야곱에게는 없었다.
이게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서도 이스마엘을 낳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동안 아브람은『고향 친척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결단과 그 행위를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롯을 데리고 나온 불순종을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순종한 것은 생각나지만 불순종한 것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세례요 예수로 옷 입는 것이다. 예수의 옷은 십자가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를 옷 입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면 구원받을 수 없다. 말로만 예수의 옷을 입었다고 하면서 상황에 반응하여 옷을 벗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옷을 벗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옷은 가죽옷처럼 피부와 결합되어 벗을 수 없는 그런 가죽 옷이 되어야만 한다. 옷을 벗어버리면 옷을 입지 않은 자가 되어 주님이 내 쳐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해야만 한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야곱은 에서를 두려워하는데,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님이 보낸 사람을 이기려고 씨름했다. 그래서 야곱의 환도뼈를 부셔버린 것이다. 『너는 이제 도망할 수 없는 존재야』이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눈에 보이는 육의 판단대로 살게만드는 환도뼈가 부셔져야만 된다. 그렇게 할 때 영적 부흥이 오게된다. 영적 부흥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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