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3장 19절『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4장은『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입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4장 3절에서『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죄를 고백하고 값없이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문제를 접할 때마다 믿음이 없음을 발견한다.
『기도하고 받은 줄로 생각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너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이런 귀절들이 떠 오르지만, 결국 알게되는 것은 삶 속에서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마 그래서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겨자씨 만큼의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옮기우리라』고 하셨다. 믿음의 결과에 대해서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없는 것이다. 믿음을 유지하고 믿음이 커지기를 바라는데, 알게되는 것은 삶 속에서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풍랑에 빠졌던 베드로를 예수님이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주님께서 일으켜 세우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없는 것을 생각하게된다.  그러나 4장 19-22절에서『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아브라함도 75세에 믿음이 생겼지만,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것은 100세가 되어서야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이삭을 얻은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을 듣고 본토를 떠났지만 온전한 순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척인 롯을 데리고 나오고, 83세에는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래서 주님이 기다리셨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이 기간이 회개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자기를 신뢰할 만한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줄 수 있었다. 아브라함도 불가능한데, 이제서야 온전히 주님 만을 믿게 된 것이다. 주께서 이루실 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 믿음의 근거는 아브라함 속에 인간의 방법이 전혀 없게 된 것이다. 전에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었는데, 이것은 인간의 방법이었다. 우리 자신도, 자신을 신뢰하는 믿음은 다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신앙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하는 모든 노력은 이스마엘이다. 주님이 아브라함을 25년간 기다리신 것처럼, 『모든 인간들이 자신을 내려놓기를』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이『예수믿기로 내가 결단한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내가 믿습니다』라고 생각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믿음에 대해서』자신을 신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개없는 믿음은 전적 타락의 증거다. 전적 타락의 인간에게는 믿음이 생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데도, 자기부인의 회개없는 자신은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개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외적으로는 믿음이 있는듯하게 보일지라도, 내적인 변화없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외적으로 믿음이 생긴 것은 자기부인의 회개 기회를 주신 것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맛나를 먹었지만, 옛사람과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도 다 함께 먹었다. 그러나 옛사람은 다 죽어야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몸에 신뢰할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이게 주님으로부터 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으로 부터 난 믿음은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때 오는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받기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아브라함이 83세에 자기 자신을 신뢰하므로, 이스마엘을 낳았다. 광야에서 옛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주님이 기다리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기다리셨고, 오늘날에도 자기를 부인할 때까지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 속에는 신뢰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기부인의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동안『내가 믿습니다』라고 생각한 모든 나의 생각이 허물어져야만 회개할 수 있다. 환상을 보고 기적을 체험하는 모든 순간들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은혜다.
그래서 의로 여기심을 얻은 것에 대해서 로마서 4장 23-24절에서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여기서 우리가 믿는 분은『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4장 24절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  단지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야만 그 사실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죽었다가 부활하실 것을 수 차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한쪽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믿지 않았다. 대제사장들은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 시체를 훔쳐갈까 봐 보초까지 세웠지만, 정작 제자들은 부활한다는 말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다 육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부활은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현재적 부활이 있는데, 오늘날 예수와 함께 장사되지도 않으면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재의 부활이 아니라, 미래 몸이 죽었을 때 부활을 믿는 것이다.
마가복음 12장 18-27절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장면에서『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그의 부활은 혼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 모든 사람과 함께 부활하신 부활이시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사람들이 육신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고,영적 체험을 해도 있어도 소용이 없게 된다. 육신에 머물러 있으면서 열심을 내어 믿어보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쌓는 결과가 될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환경, 체험 등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예수를 무덤에서 살리신 그 분 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분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자는 그 분이 좋은 것을 주시면 기뻐하고 실패를 주시면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자는  환경에 요동하지 않게된다. 이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은 죽은 자에게서만 주어진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