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2절『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소경은 어두움이다. 마귀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그 기적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불의의 속임으로 역사한다.『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주님이 미혹의 역사를 허용하신다고 했다. 강팍한 사람을 더 강팍하게 하신다. 이렇게 되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이런 설교를 잘 하지 않는다. 대부분 은혜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구할 것은 주님의 긍휼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빠져들어가는 생각이 성령의 생각인지 악한 영의 생각인지? 빛과 어둠을 판단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마가복음 4장 12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와 같은 의미다. 이 앞에는 네가지 밭의 비유가 있다. 길가, 가시떨기, 돌짝, 그리고 좋은 밭이다. 좋은 밭은 말씀으로 인하여 핍박을 견뎌내고, 인내로 결실하는 밭이다. 위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이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이 말씀의 뜻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돌이킨다는 것은 거듭난다는 말이다. 거듭나야 죄사함을 얻는다.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회개하고 돌이켜지는 것이다. 회개하여 거듭난다는 말이다. 회개하면 주님이 회개하는 자의 속을 바꾸어주신다. 회개없는 거듭남은 없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없는 죄사함은 없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회개도 없이, 죄만 자백하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믿는 잘못된 믿음과 가르침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다. 요한1서에서 말하는 죄사함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한 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피만 따로 적용되지 않는다.
출애굽기 유월절 규례를 보면, 유월절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빼서 칠하는 것이다. 양의 죽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게 세례다. 세례가 장사의 과정을 거친 거듭남이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거듭남이다. 마태, 마가, 누가는 거듭남을 세례로 표현했지만 요한복음은 거듭남으로 표현했다. 회개해야 거듭나는 것이다. 거듭나야 죄없이 함을 얻게된다. 구약시대 제사장은 양을 죽여서 그 양의 죽음과 연합된 다음에 물두멍에서 물로 씻는다. 성전 마당에 들어서면 물두멍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죽이는 놋 제단을 만난다. 죽음과 연합되어야만 씻는 것이다. 그 다음에 거룩한 예복을 입고 기름을 바른다.
오늘날 거듭나지도 않은채 성령체험으로 믿게 하는 것은 다 불법이다. 정상적으로 회개하여 거듭나게 해야하는데, 어떤 교회에서는 거듭남에 대해서는 관심없고, 성령 체험하고, 방언받고, 예언기도 받게 하는 것을 가끔 본다. 이게 다 인간이 뱀의 독이 퍼져서 불법을 행하는 것이다.
성전의 마당에서 만나는 놋제단에서 짐승이 완전히 죽어야만 한다. 그 죽은 짐승과 연합되어야만 한다. 이게 세례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이것이 성소에 들어가는 순서다.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세례는 장사되는 것이다. 곧 죽음이다. 장사되지 않으면 예수의 피가 역사하지 않으므로 죄 사함이 없다. 그렇게 되어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과정을 무시한채,『예수가 내 대신 죽었음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으면 장사된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겠는가? 내 대신 죽는 것은 죄의 문제 때문이다. 구원의 핵심은 죄 용서가 아니라 누가 주인이 되는가의 문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장사되어야만 주인이 바뀌는 것이다. 장사되는 것은 옛사람이 장사되는 것이다. 옛사람은 육으로 비롯된 혼적 존재로, 재물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을 다시 동경하는 그런 옛사람이다. 이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사람이 태어나지 않는다.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인간들이 주는 극렬한 고통 중에서 최악의 고통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런 죽음의 대가를 주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구원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은 자기의 전부를 주시고, 회개하는 자의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그런데 장사의 과정을 외면한 채 부담없이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다.
구원의 시작은 구약에서 주님이『나 외에 다른 신을 너희에게 두지 말라』고하셨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은『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합당치 않다』고 말씀했다. 여기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나보다 집, 밭, 부모, 처, 자식,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이것을『성화』라고 가르친다. 많은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데, 육신으로 인해서 성화가 되지 않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장사되는 과정이 바로 성화라는 사실이다. 사도바울은 물세례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말해 두었지만, 성령세례는 에베소서 5장에서만 말해놓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형수와 같은 죄인들이다. 로마서 1장 32절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열거해 놓고 있다. 사형수는 죽어야만 하는 죄인들이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 하나님께 큰 죄나 작은 죄나 다 사형이다. 다 피 흘려 죽어야만 한다. 예수님의 피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예수와 연합되면 함께 피흘려 죽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의 회개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부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이므로 세상이 너무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인이면, 자기부인의 회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살길은 오직 회개뿐이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죄의 반성이지 회개라고 말하면 안된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회개해야 주님이 세례로 거듭남을 주시는 것이다. 거듭남이 세례 안에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될 때 죄사함을 얻는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삼년간 예수를 따랐지만, 거듭나지 않으므로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버렸다.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가 버렸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에서는 기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떠나 갈 것이다. 회개없는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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