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자


사도행전 26장 18절『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바울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이시다. 눈이 있어도 소경이므로 어둠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눈을 뜨게하니까,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빛을 사모하게 된다. 사단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눈이 뜨져야만 되는 일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이 말씀도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다. 믿는 자들 중에서 기업이 있게 하신다. 기업이 바로 주님의 몸이다. 자기부인의 회개없이 믿는 자들은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발판일 뿐이다. 성령의 기쁨과 은사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된다.
다윗은 살인과 간음죄를 지었다. 그것으로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죄를 자백하고 반성한다고 회개되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 나단이 말하기를 “부자가 양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손님에게 자기 양이 아까워서 옆집 과부가 가지고 있는 한 마리 양을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듣자말자 다윗이 분노했다. 그 선지자는 다윗에게 죄를 말하지 않고 죄의 뿌리인 탐심을 말했다. 이게 사도 야고보가 1장 15절에서 말한『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았다』고 말한 그것이다. 욕심이나 탐심은 죄의 뿌리다. 이것으로 인해서 죄가 생산되므로, 죄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던 것에 대해서 성경은『사탄이 하와에게 탐심을 자극했다』고 말했다.
탐심이 자극된 후에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된다. 탐심의 뿌리가 사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탐심이 자극되면 더러움에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이다. 다윗은『그 자는 죽어야 한다』고 분노했다. 다윗의 자기 이야기다. 남을 비판할 때 남을 비판하는 그것이 사실은 자기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그 비판을 함으로서 그 비판이 비판한 자에게 들어오게 된다. 비판은 사단의 술수다. 입으로 비판을 할 때마다 그 비판의 내용이 입을 타고 들어오는 것이다. 다윗이 느낀 것은『내가 죄를 지은 더러운 자구나』가 아니라, 『내가 소경이구나, 내 이야기를 내가 몰랐구나』라는 것이다. 주님이 다윗의 눈을 뜨게 한 순간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동일한 일을 베드로에게도 하셨다.
베드로가 삼년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과 같이 생활했는데, 이 세상의 법을 어기거나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베드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계시로 완전히 믿었다. 주님이 베드로가 회개하도록 택하신 방법은 거짓말이었다. 다윗은 살인과 간음이었지만 그에 비해서 약한 죄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죄든지 주님은 회개로 인도하신다.『오늘밤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리라. 우리는 주와 함께 감옥에도 갈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그렇게 결단하는 것이 믿음인 줄로 생각했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인지 아니면 아니면 결단을 믿음으로 생각한 것인지? 결국 거짓말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죽음을 무릎쓰고 풍랑 위를 걸어갔는데, 왜 예수를 부인했는가? 풍랑 위에는 예수님이 있었지만, 십자가에서는 예수님이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해 줄 예수가 사라진 것이다. 이게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자신을 보호해 줄 예수가 사라지므로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십자가 앞에 서기 전까지는 어떤 기적을 체험하고 성경 지식으로 무장을 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 서기까지는 구원의 기회일 뿐 구원이 아니다.
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했다.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도망가버린 후에,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죽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셨다. 베드로는 자신이 거짓말 하기 전에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이것이 주를 거슬려 주를 대적하는 죄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진실을 말한다고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거슬려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옛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쟁이다. 십자가 앞에 서기 전의 모든 구약시대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쟁이다.
내적변화를 통해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께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는다. 이게 십자가의 신약시대로 들어서는 것이며, 구원이다. 옛사람을 벗는 것은 내가 주인임을 버리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은 자기가 주인임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죽기 얼마 전에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내려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왕의 모습, 재림의 모습을 본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인임을 나타낸다. 초막 셋을 지어서 같이 살자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가 축복을 받으면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발로된다. 회개하지 않은 자가 천국을 봤다고 가정한다면, 자기가 왕이 된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저주까지 했다. 누가복음 22장 60-61절에서『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하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통곡한 것이 회개는 아니다. 회개는 십자가와 연합되는 것 외에는 없다. 베드로는 씁쓸하게 울고 도망갔다.
오늘날도 거짓말을 하고 즉시 죄를 고백하고 반성한다고 거짓말이 사라지는가? 거짓말하는 원인이 죽어야만 한다. 거짓말하는 원인은 대개 두려움 때문이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베드로도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친 것이다. 주님이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안되는 것이다. 사단에 속한 자들은 다 장님이다. 그래서 사단에 속한 자들은 다 두려움에 떨게 된다. 왜냐하면 장님들은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았다. 보좌에 계신 예수를 만났다. 육신의 눈을 멀게 했지만 자신이 거짓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자신이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빛이 비춰주시지 않으면 깨달을 수도 없고 흑암으로 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이 절망 속에서 마음이 상한 자가 복을 받는다. 이것이 바울의 깨달음이고 다윗의 깨달음이며, 베드로의 깨달음이다. 오늘날 우리도 자신이 흑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된다. 그때서야 주님이 빛을 비춰주시고 어두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이게 안되면 나도 언젠가『예수를 모른다니까』로 바뀌게 된다.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빛을 비춰주신다. 겸손히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해야만 한다. 하늘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빛을 비춰주셔야 회개가 이루어진다. 먼저 흑암에 있는 자신을 깨달아야만 한다. 다윗에게 나단을 보내주신 것 같이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빛을 깨달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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