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갈라디아서 3장 23절『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 때까지 갇혔느니라』그냥 예수믿으면 되지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하는가? 이 귀절은 세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한 사전 말씀이다. 그런데 27절에서『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지는 것이다.
죄의 고백이 있다고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십자가에서 못박혀죽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영이)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체가 살아 있을 때 미리 혼이 죽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가면서 성경을 설명하시는데,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떡을 떼었을 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즉시 사라져버렸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속 동행하시지 않고 사라졌는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과의 동행은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설명한 다음 고린도전서 15장에서『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바울은『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고 꺼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죽을 육체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육체는 계속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죽을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은 성령의 능력을 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내 몸에 짊어지는 것이다. 이게 구원이다. 바울 서신이 일곱개인데, 서신들 중에서 가장 길게 설명한 것은 성령 충만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에베소서에 잠깐 언급), 세례에 대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례 안에 다 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죽옷을 입은 아담처럼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다면 나머지는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다.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에 집중하면 부활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다. 이 말씀은 29절에서 마친다.『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유업은 가나안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유업(기업)은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을 들어가는 것이다. 애굽을 나오는 믿음은 있지만 그것이 자동적으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애굽을 나오는 믿음은 뒤돌아 보지 않고 도망하면 된다. 그런데 가나안은 내가 들어가야만 한다. 이것은 주님과 연합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우리의 삶이 광야에서 예배와 순종으로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넘기운 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만이 우리가 구해야 할 모든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이 성경 귀절 외에 다른 것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세례가 무엇인지를 편지를 쓴 것이다. 세례는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2000년 전에 못박히신 예수와 연합되는 믿음이 오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 외워서 이해하고 찬송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이 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이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 매인바 된 것이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예수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나아가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느냐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사울처럼 율법적인 인간이 된다.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이게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의 모습이다. 죽은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는 자가 된다. 죽은 어린양은 거저 나를 위한 대속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이루려 오셨다. 사울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할 자로 보이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기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로 생각한다. 어두움 속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어린양과 하나가 되지 않고, 어린양을 죽인 자는 결코 예수를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아무리 찬양하고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사울의 삶 앞에서 깨어나, 바울과 같이 되어야만 한다. 율법 아래 매여있기 때문에 믿음이 와야만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은 십자가에서 죽는 믿음이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믿으면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복잡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로마서에서 율법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율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라고 생각하므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율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약시대의 바리새인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자기의 존재를 의롭게 나타내려는 모든 사람들일 것이다. 자기라는 존재는 어둠의 존재다. 그래서『부인하라』는 말씀이다. 사도바울은 사울의 때에 유대인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올 수 있는 공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사울은 자기 이성으로는 자기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된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이성으로는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라는 것을 인식할 뿐이었다. 단 하나,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죽이고 싶은 것이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은혜를 입고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스도는 고난 당하고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셨던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한편으로 핍박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신다.
사울이 삼일간 소경이 되었지만, 그가 깨달은 것은 그 동안 살아온 삶 전체가 소경이었다. 하늘의 빛이 비춰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늘의 빛이 비춰져서 회개하는 은혜의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오직 회개만이 살길이다. 회개는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함께 죽는 것이 회개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종교 형식에 불과하다. 사울처럼 육체의 욕구가 죽은 자 같이 되어야만 한다. 애통하며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사울처럼 마음의 굳은 땅을 기경해야만 한다. 이것이 마음의 할례다. 세례없이 죄 사함은 없다. 세례는 예수와 함께 자아(혼)가 죽는 것이다. 이 믿음이 오기 전에는 다 율법 아래 매여 있는 것이다. 세례는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죽고자 하는 것이다. 회개는 죽고자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는 말씀이 이런 뜻이다. 혼이 죽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짐이니라』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만 약속이 주어진다.
댓글
댓글 쓰기